'안동고 시대' 연 명장 최건욱, 노익장으로 대학 무대서 전설 재현 꿈꿔[최규섭의 청축탁축(淸蹴濁蹴)]

조남제 2022. 1. 26.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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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은 오래 묵을수록 맵다‘라고 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과 맥이 통하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경험이 많거나 익숙한 이가 더 잘하는, 평범함 속에 담긴 이치를 비유적으로 이른다. 시간의 흐름에 묻혀 퇴색함을 꿋꿋이 거부하는 노익장이 더욱 돋보이는 까닭이다.

고교 축구 최고의 용장이었다. 어느 날, 30년간(햇수 기준) 고교 축구 마당을 휩쓸던 그가 그라운드에서 자취를 감췄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령하던 최건욱 안동고등학교 감독의 실종(?)은 그만큼 궁금증을 자아냈다.

돌연 사라졌던 그는 홀연 되돌아왔다. 우리 나이 예순세 살에 다시금 사령탑에 앉았다. 무대가 바뀌었다. 3년 만에 되돌아와 밟은 그라운드는 낯선 대학 마당이었다. 2020년 10월, 그는 대신대학교 창단 감독으로서 또다시 승부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평생을 걸어왔던 승부의 길에서 떠나 축구를 잊고 살아가려 했다. 처음엔 홀가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어느 순간 그리움으로 화했다. 무엇보다 자존감을 잃어 가는 듯해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애오라지 축구에 매달렸던 삶이었다. 가족에게 소홀했던 미안한 마음을 씻고 싶었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긴 그를 축구계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탐내며 구애의 손길을 뻗쳐 왔다. 감독의 열정을 불살랐던 경북을 중심으로 영남 지역과 부산, 고향인 전북, 멀리 경기도에서도 러브 콜이 쏟아졌다.

결국 그는 고심 끝에 ‘승부사 복귀’의 결단을 내렸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보루만은 지켰다. 사령탑에서 용퇴의 결심을 굳힐 때 다짐했던 ‘가족과 함께’였다. 파격적 조건을 내세운 여러 구애의 손길을 뿌리치고 가족의 둥지가 있는 대구광역시 근처의 경산시에 자리한 대신대를 택한 배경이다.

고교 명장의 솜씨는 대학 마당에서도 빛나… 실질적 첫 무대에서 16강 진출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명장의 존재감은 그대로였다. 최건욱 감독은 살아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갓 태어난 대신대를 이끌고 통영 제18회 1·2학년 대학대회(1월 6~21일)에서 결선 라운드(24강전)에 올라가는 파랑을 일으켰다. ‘1승은 거둘 수 있을까?’ 의구심의 눈초리를 비웃듯 1차 관문(예선 리그)을 뚫고 결선 고지를 밟으며 “우리는 1승의 제물이 아니다”라고 힘차게 외친 대신대다.

결선 라운드에서도 이변은 계속됐다. 문경대학교를 희생양 삼아 첫판(24강전)을 장식했다. 비록 상지대학교의 걸림돌에 치여 8강 티켓 획득은 좌절됐어도 대학 축구계에서 회자될 만한 16강 진출이었다.

실질적 첫 무대인 이번 대회에서, 대신대는 3승을 올리는 동안 두 번을 졌다. 그 2패의 쓰라림은 우승 팀(전주대학교)과 준우승 팀(상지대)이 안겼다. 그가 “그만큼 가능성이 엿보였던 무대였다”며 스스로를 달랠 만한 전과다.

“선수들이 감독을 믿고 따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고교 축구에서 쌓은 오랜 지도자 경험이 하나의 밑거름이 됐다고 본다”.

사실 지난 1년은 그의 승부사다운 기질이 그대로 표출된 한 해였다. 그는 대신대를 맡으며 과감한 한 수를 던졌다. ‘한시적 팀 운영’을 자처했다. “총장님(최대해 목사)께 ‘한 해를 지켜본 뒤 그 성과를 바탕으로 창단을 결정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발족 당시 이미 한 해의 스카우트가 끝난 시기여서, 선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간신히 14명의 선수를 꾸려 시험적으로 치른 2021시즌이었다.

이번 대회 결실에 만족해한 학교 측에선 큰 폭의 지원을 약속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 7억 원가량을 들여 인조 잔디 구장을 포설 중이다. 오는 3월 예정인 구장 완공과 함께 창단식도 열린다. 선수단 숙소는 임차 아파트에서 기숙사(생활관)로 바꾸어 이미 입주를 끝냈다.

축구로 수놓은 인생극, 제3막 시작되다

최건욱 감독의 ‘축구 인생’은 3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좌절도 있었다. 영광도 있었다. 그만큼 영욕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마냥 비탄에 잠기지만은 않았다. 늘 환희에 젖어 있지만도 않았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운명을 개척했다.

제1막은 불운했다. 대학교(명지) 1학년 때 불쑥 부상의 악령이 들이닥쳤다. 부풀렸던 대성(大成)의 꿈을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다. 곧바로 새로운 운명에 도전했다. 교사가 돼 후학 양성에 나서는, 곧 지도자로서 선수를 키우는 길로 방향을 바꿨다. 명지대학교를 자퇴하고 전북대학교 사범대학에 새로 들어갔다. 지도자를 향한 장기적 포석으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제2막은 대반전이었다. 감독으로 변신해 독보적 조련 능력을 뽐냈다. 1988년, 안동고 체육교사로 발령받고 키워 왔던 꿈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고교 축구 마당을 평정해 갔다. 1992년, 전통의 청룡기 중·고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국 무대 첫 정상에서 포효했다. 안동고 천하가 비롯했음을 알리는 사자후였다. 1996년엔, 최고 권위의 고교 선수권 대회와 청룡기 패권을 휩쓸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2000년대까지 안동고는 고교 축구의 전설이었다. 우승 13회, 준우승 7회를 비롯해 4강 약 50회의 눈부신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사령탑에 앉아 있는 동안, 안동고는 ‘국가대표 산실’로도 자리매김했다. 최윤열을 필두로, 김도균·김진규·백지훈 등 대한민국 축구를 선양하는 데 한몫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2020 도쿄(東京)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정승원도 그의 제자다. 특히,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끈 2006 독일 월드컵 한국 국가대표팀엔, 김진규와 백지훈이 발탁됨으로써 안동고의 성가가 드높아지기도 했다.

제3막이 올라갔다. 또다시 탈바꿈했다. 대학 축구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제 예순다섯 살, 그래도 노익장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더 불타오른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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