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는 올해의 덕담, 지나치게 공부하지 말자

조경숙 입력 2022. 1. 26.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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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씁니다] '러닝커브'는 IT업계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로, 신기술을 학습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뜻한다. 근무시간에는 일을 하고, 휴식 시간을 활용해 학습하는 일상을 보내야 했다.
여성의 시간 빈곤은 육아·가사와 노동의 병행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시사IN 자료

뮤지션 ‘아마도이자람밴드’는 연말이 되면 멤버들과 덕담 게임을 나눈다고 한다. 새해 소망을 담아 덕담을 해주는 게임이다. ‘내년엔 창작 아이디어가 샘솟는 한 해 되길’ ‘운동하며 부상 없는 한 해 되기를’…. 한 해 동안 상대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사려 깊게 살펴야 할 수 있는 덕담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또 내년을 나누는 담백하고 다정한 방식이라 여겨져 오래 마음에 남았다.

새로운 해가 찾아온 지금, 내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어떤 덕담을 나누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에게는 이런 덕담을 남겨주기로 했다. “2022년은 학습에 강박 갖지 않는 한 해가 되자.” 2021년에는 AI 개발을 공부하느라 120시간짜리 인터넷 강의를 이수하고, AI 관련 사이드 프로젝트 하나에 참여하고, 자격증 시험 공부도 하느라 진땀을 뺐지만, 올해는 신기술에 대해선 아무 공부도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불안감을 동력 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발언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건 IT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다. 내가 거쳤던 IT 회사마다 많은 직원이 언제나 공부하고 있었다. 선배들 대다수가 매년 열리는 IT 콘퍼런스에 참석하고, 신기술 동향에 대해 리서치하며, 그 내용을 정기적으로 조직에 공유했다. 부서별 혹은 본부별 학습 모임이 있었고 매년 학습 모임에서 공부한 결과를 발표하고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연말을 마무리했다. 신기술 동향 스터디도 있었고, 새로 나온 개발언어를 공부하는 모임도 있었다. 언제나 트렌드를 선도해야 하는 IT 회사로서 당연한 문화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연하다는 것이 때로는 스트레스와 강박으로 다가오거나, 때로는 업무상 차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로 러닝커브 때문이다.

‘러닝커브(Learning curve)’란 IT 업계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로, 신기술을 학습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을 나타내는 곡선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마다 난이도가 다르고, 사람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르니 어떤 기술을 누가 공부하느냐에 따라 러닝커브가 다르다. 러닝커브가 가파른 사람은 학습 속도가 빠른 것이고, 반대로 러닝커브가 완만한 사람은 학습 속도가 느리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러닝커브에 영향을 미치는 건 개인의 역량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는 것과 별개로 근무시간에는 언제나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학습은 자연히 휴식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과업이 된다. 보통 아침에 일찍 와서 공부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혹은 스터디 그룹을 운영하는 경우에는 점심에 도시락을 시켜 먹으며 함께 코딩하거나 퇴근 뒤에 모여서 프로젝트를 하곤 했다. 러닝커브가 아무리 가파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기술 공부에 들어가는 절대적 시간은 꼭 필요하다. 그러니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IT업계는 신기술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업종이다. 아래는 한 IT 콘퍼런스 모습. ⓒ연합뉴스

여성과 남성의 ‘시간 빈곤율’ 차이

그러나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24시간인 건 아니다. 연령과 성별, 노동 유형과 강도에 따라 자유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빈곤’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시간 빈곤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논문 ‘시간 빈곤인의 노동시간 특성에 관한 연구(신영민, 노동정책연구, 2021)’에 따르면, 30대 여성의 시간 빈곤율은 34.38%로, 30대 남성의 시간 빈곤율인 25.63%에 비해 현저히 높았다. 또한 30대 여성의 이러한 시간 빈곤율은 20대 여성 26.91%에 비해 7%가량 높은 수치다. 전 연령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시간 빈곤율이 높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해당 연구에서는 “여성의 시간 빈곤은 육아·가사와 노동의 병행”이 그 원인이라고 추측했다.

학습이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 출산과 육아·가사노동도 똑같이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루 24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잠은 자야 하고, 밥은 먹어야 한다. 이를 ‘생활 필수시간’이라 한다. 여기에 업무 시간을 더하고 통근 시간을 합치면 손안에 떨어지는 건 많아봐야 서너 시간. 그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낼 것인가, 공부에 투자할 것인가. 내가 보아왔던 많은 경우, 러닝커브는 이 지점에서 결정되곤 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업무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업무 역량이 자꾸만 떨어진다고 느껴지기 쉽다. 새로운 기술은 자꾸만 나오고 트렌드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IT 기술은 로켓이나 우주선이 아니라 오히려 발밑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트레드밀 같다. 달려도 달려도 나아가기는커녕 현상 유지만 하는 것 같고, 잠깐 쉬자니 금세 저만치 밀려나 버리는 무한 달리기의 장. 수년 전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막연한 불안감과 위기감에 산후조리원에서조차 노트북을 챙겨 꾸준히 코딩했다. 집에서도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틈틈이 프로그래밍 책을 읽었다. 그렇게 공부를 했어도, 이력서에 쓸 프로젝트가 없는 휴직 기간 1년은 나를 영원히 따라다닐 공백 같았다.

일·가정의 ‘양립’조차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배움까지 ‘삼립’하자는 건 너무 거대한 요구일까. 그러나 달려 나가는 트렌드를 멈춰 세울 수도 없고, 아이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낼 수도 없다. 아무리 달려도 모든 걸 손에 쥐기는커녕, 모든 걸 잃을 수밖에 없는 이 시스템 앞에서 많은 이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 역시 수면시간을 줄이기도 하고, 통근 시간을 활용하는 등 시간의 밀도를 높여보기도 했지만, 내 러닝커브 곡선을 바꿔 그릴 순 없었다. 일터에서 잘 해내고 싶었고, 개인 역량도 키우고 싶었으며, 동시에 아이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충분히 누렸으면 했다. 그러나 매년 남은 건 모래알 같은 허무함뿐이었다.

시간이 없는 게 어디 여성 개발자뿐이랴. 직군·직업과 관계없이, 여성들은 누구보다 바쁘게 일할 30대에 가장 많이 경력이 단절된다. 통계청 고용정보조사에 따르면, 2020년 경력 단절 비중은 30대 여성이 46.1%로 가장 높았다. 모두 다 다르긴 해도, 이들의 어려움이 비단 ‘일·가정 양립’에만 있었던 건 아닐 터이다. 이보다 더 나아지기를, 더 잘할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현상 유지조차 힘들고 버거울 때 나 역시 경력 단절을 생각한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배우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커리어’라는 단어를 지운 채 살아보려 한다. 계속 불안감에 떠밀려 다니고 싶지는 않다. 내가 2022년에 거는 유일한 기대는 성장이나 성취가 아니라 ‘안정감’이다. 올해의 다짐을 내년엔 결국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오늘의 나는 만족하는 것 같다.

조경숙 (테크-페미 활동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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