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 가난한데 고용률은 OECD 1위, 이유는 질낮은 일자리

손호영 기자 2022. 1. 2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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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남 공주에 사는 박모(64)씨는 3년째 동네 마트에서 청소 담당으로 일한다.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근무하고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다. 50대 후반까지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은퇴 후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봤지만 재취업에 실패했다. 박씨는 “또래 동창들은 월 60만~70만원 정도 받으며 주민센터의 시니어 일자리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는 생활이 안 된다”며 “아직은 몸이 건강해 마트 일도 무리 없이 해내지만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2. “이 글은 내가 62세부터 65세까지 겪은 취업 분투기다”로 시작하는 고(故) 이순자 작가의 논픽션이 지난해 화제가 됐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어린이집도 운영했고, 미술·문학·음악 상담치료 1급 자격증도 있었지만 일자리를 얻기 위해 ‘중졸’로 이력을 속였다. ‘수건 접기’ ‘백화점 식품관 청소’ ‘호스피스’ 등 숱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겪은 모멸감 등을 그렸던 작가의 경험담은 많은 중·노년층에게 공감을 얻었다.

25일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76세 이상 노인 인구 절반이 가구소득이 중위 소득 50%에 미치지 못하는 ‘빈곤층’인 것으로 분석됐다. 동시에 은퇴 후에도 일을 놓지 못하고 노동시장에 머무르는 ‘고용률’도 OECD 국가 중 1위로 집계됐다. 노후 준비가 부족하고 빚이 많아 은퇴 후에도 일을 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구한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인 일자리인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11월 29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광장에서 열린 '제10회 수원시 노인일자리 채용한마당'에서 구직자들이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한국경제연구원이 25일 공개한 ‘중·고령층 재취업의 특징 및 요인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OECD 회원국 중 고용률 순위가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0~44세엔 76%로 32위에 머무르던 고용률이 50~54세부터 OECD 평균(75.7%)을 넘어섰다. 65~69세 엔 순위가 2위까지 치솟았고, 70~74세가 되자 고용률은 37.1%로 OECD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조사 대상국 평균(15.8%)의 두배가 넘는 수치다.

이렇게 오래도록 일한다면 빈곤율은 낮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엔 정반대였다. 18~65세 빈곤율은 11.8%로 12위 수준이었지만, 66~75세 구간부터 이 수치가 34.6%로 급증했다. 전체 조사대상 국가 중 1위다. 76세 이상이 되면 빈곤율은 55.1%로 치솟는다. OECD 평균은 16.6%인데, 우리나라는 절반 넘는 노년층 인구가 빈곤층인 것이다.

원인은 질 낮은 일자리였다. 중·고령층이 퇴사 후 1년 안에 정규직으로 재취업하는 비율이 10명 중 1명 수준으로 조사됐다. 현행 근로자 정년은 60세지만 주로 55세쯤 임금피크제 대상이 되어 은퇴를 준비하게 된다. 연구진이 한국노동패널을 사용해 분석한 결과, 퇴사 시 연령이 55~74세인 경우 1년 내에 정규직으로 재취업하는 비율이 9.0%였다. 비정규직 재취업률(23.8%)에 크게 못 미치는 숫자다.

5년 이내로 범위를 넓혀 봐도 정규직 재취업률은 11.5%, 비정규직 재취업률은 39.4%인 것으로 조사됐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비율(16.7%)이 정규직 취업보다 오히려 높았다. 부채가 있을 경우 비정규직으로의 재취업 확률이 14% 늘었다.

정부가 질 낮은 단기 노인 일자리만 쏟아내며 고령층의 적성과 경험을 살리는 질 좋은 일자리 대책엔 소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8월 발표한 연구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이 노인의 소득 개선을 통한 노인 빈곤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사회관계를 개선해 정서적 고립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면서도 “노인 일자리 대부분이 월 27만 원을 받는 공익활동으로 ‘단기 알바’에 그치고 있어 일자리의 질적 측면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유진성 한경연 연구위원은 “다른 OECD 국가들의 경우 70대 중반까지 양질의 일자리로 부를 축적하기 때문에 빈곤율이 낮은 반면 우리나라는 55~74세의 정규직 재취업률도 낮은 상황”이라며 “호봉제 중심의 임금체계를 직무급·성과급제로 개편하고 임금피크제를 확산해 기업들이 중·노년층의 전문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현행 32개 업무에 대해서만 파견직 일자리가 허용되는 것도 노년층에 한해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연금 제도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노년에 빈곤을 겪는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노후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평생 일해온 경우가 많다. 유 연구위원은 “지금도 근로자의 상당수는 공적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고, 사적연금 가입률도 16.9%로 OECD 평균(67.5%)보다 낮은 수준”이라며 “근로 기간에 더 오래 연금에 가입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사적연금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하고 장기보유에 대해선 추가 세제지원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주택연금을 통해 노후 소득을 대체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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