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프란츠 파농 [김동현의 내 인생의 책 ③]
[경향신문]
프란츠 파농을 처음 접한 것은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읽으면서였다. 대학 시절 헌책방에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도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유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입도 몇 대손이니 하는 항렬이 자연스럽기도 했지만, 그 무렵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현기영은 제주 사람들이야말로 “물 위에 뜬 뇌옥(牢獄)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는 표준어 시범학교였다. 학교에서는 사투리를 쓰지 못하게 했다. ‘국민통합에 저해된다’는 게 이유였다. 행여 육지라도 가게 되면 ‘사투리 좀 해보라’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말이 놀림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육지에 가면 본의 아니게 과묵해졌다. 용케 서울로 진학한 또래 친구들이 제일 먼저 익힌 것도 표준어였다. 우리는 그것을 ‘곤밥(쌀밥) 먹는 소리’라고 놀렸지만, 따지고 보면 표준어의 세계로 도망칠 수 있었던 그들에 대한 동경이기도 했다.
4·3을 알게 되면서 제주는 말을 빼앗긴 땅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다.
‘빨갱이’라는 낙인은 이념적 폭력만이 아니었다. ‘말하는 입’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채찍이며, 말의 기억을 빼앗는 약탈이었다.
제주의 말은 고통을 기억하는 제주 사람들의 몸이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치마폭에서 항상 듣던 말이 있다. ‘아이고, 이 설룬 애기야.’(이 말의 질감을 표준어로 옮길 자신이 없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20년이 넘었다. 표준어의 ‘하얀 가면’이 아니라 제주 말의 ‘검은 피부’를 가르쳐준 섬 땅의 모든 할망들을 기억한다.
김동현 | 문학평론가·제주 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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