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사생활 제로 시대의 진화심리학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2. 1. 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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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의 통화 녹취 방송은 김씨가 공인이라 사생활 보호보다는 국민의 알 권리가 먼저라며 일부를 제외하고 허용한 법원의 판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아무튼 이제는 사생활 제로 사회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라.”
- 스콧 맥닐리, 선마이크로시스템스 최고경영자(CEO)

요즘 드라마 작가들의 고민이 깊을 것 같다. 현실에서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한 일이 자주 일어나니 말이다. 지난 16일 저녁 김건희 녹취 파일 방송이 대표적인 예로, 방송 전만 해도 김씨가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보였지만 막상 방송이 나가자 "이게 뭐지"라는 반응이 주류였다. 물론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니 문제 발언도 적지 않았지만, 애초 ‘기대치’에는 못 미쳤다. 

게다가 방송 이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팬카페 회원 수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화제가 됐다. 방송 전까지 불과 200여 명이던 회원이 24일 현재 6만 명을 넘어섰다. 다수는 김씨 남편 지지자들이겠지만 단기간에 이정도 사람들이 일부러 카페를 찾아 회원으로 가입하는 열정을 갖게 된 데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이런 반전의 원인으로 일부 언론은 김씨의 진영논리를 떠난 ‘사이다’ 발언을 들고 있다. 일종의 걸크러쉬 반응이라는 것이다. 물론 맞는 분석이겠지만 이런 현상을 일으킬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만일 김씨가 공식 인터뷰에서 같은 말을 했다면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사적 통화의 생생함이 드라마를 볼 때처럼 시청자들의 이성 아니라 감정을 더 강하게 자극해 뜻밖의 반응이 나온 게 아닐까. 

배우자를 훔친 여성에서

녹취를 들으며 시청자들은 '쥴리설'과 '동거설'에 대한 발언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김씨가 과거 유흥업소에서 쥴리라는 예명으로 일했다는 의혹과 유부남과 동거했다는 의혹이 공중파 방송을 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한 김씨의 발언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소되면서여성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그가 진실을 말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지적도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 텍사스대의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 교수는 저서 ‘진화심리학’에서 여성은 번식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배우자를 유지해야 하고 따라서 배우자를 훔쳐가는 여성이 큰 위협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누군가의 배우자를 뺏는 데는 단기적 불륜(매춘)과 장기적 배신(딴 살림)이라는 두 형태가 있다. 

공교롭게도 김씨는 두 형태 모두를 통해 배우자가 있는 여성들에게 피해를 줬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따라서 그동안 이 소문을 믿었거나 그럴듯한 얘기라고 여겼던 여성들 대다수는 본능적으로 김씨에게 적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만일 MBC가 이 발언 부분을 내보내지 않았다면 적어도 걸크러쉬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속이는 자에 대한 혐오

“브루트스, 너마저?(Et tu, Brute?)”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무리 사이에서 친구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발견하고 이렇게 탄식했다. 이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믿었던 친구에게 칼을 들이밀었다는 사실만으로 브루투스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경멸을 받고 있다. 윌리엄 설리번의 1888년 작품 ‘브루스트 너마저’. 위키피디아 제공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접근해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사적 통화를 녹음해 공영방송에 넘긴 사람이 전화 통화에서 "누나”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구는 장면에서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배신 장면을 볼 때의 몰입감과 함께 분노와 동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배신행위는 강렬한 감정을 촉발하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약방의 감초다. 수년 동안 애인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고시에 합격한 잘생긴 청년이 출세를 위해 애인을 버리고 부잣집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뻔한 이야기를 “식상하다”라고 말하면서도 보는 이유다. 

버스 교수는 책 9장 ‘협력적 동맹’에서 인류가 무임승차자나 사기꾼, 배신자들을 역겨워하는 것은 수십 명 규모로 이뤄진 수렵채취인 사회가 존속하기 위한 마음의 진화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런 행위를 한 사람은 처벌을 받거나 쫓겨났다. 그 결과 남들의 평판에 예민한 마음도 진화했다. 자칫 반사회적 인물로 찍혀 쫓겨나 혼자가 되면 맹수가 우글거리는 들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시뮬레이션 결과 상호적 이타성에 기반해 돌아가는 인류 사회에서 성공을 담보하는 핵심전략은 ‘절대로 먼저 배신하지 마라’와 ‘상대방이 먼저 배신한 다음에만 보복하라’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비록 시청자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드라마를 볼 때처럼 감정이입이 되면서 ‘먼저 배신한’ 녹취자에 대한 경멸감이 통화 내용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 앞선 게 아닐까.

사생활 유출, 남의 일 아냐

이제 소매치기는 사양 업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때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기록을 남겨 화를 자초한다. CCTV의 존재는 사생활 정보 유출을 막으려는 무의식적 행동을 촉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끝으로 사생활(사적 통화)이 공영방송을 통해 노출되는 장면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꽤 작용했을 것이다. 녹화나 녹음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인터넷이 깔리면서 사생활이 유출되는 범위가 주변 아는 사람들 정도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 심지어 지구촌인 시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여성들은 상황이 심각해 늘 몰래카메라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신세가 됐다. 몰래카메라가 주로 포착하려는 건 차마 사생활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런 여성들에게 이번 통화 녹취는 몰래카메라의 음성 버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스마트폰에 통화 녹음 기능이 있다는 걸 뻔히 아는 김씨가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일을 자초했느냐는 점이다. 오죽하면 일각에서 김씨가 녹취를 역이용했다는 주장까지 나왔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교수가 강의 중 성희롱 같은 부적절한 발언을 할 때 학생이 녹취해 공개하면서 직위해제 같은 중징계를 받는 일이 가끔 뉴스에 오른다.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일이 보도됐고 자신의 발언 역시 수강생 가운데 누군가가 녹취할 수 있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십수 년을 노력해 간신히 얻은 일자리를 허무하게 잃는 걸까. 어린이집 학대 사건도 마찬가지다. 수년 전부터 CCTV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모든 행동이 기록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을 해코지하다 걸리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한편 자발적으로 사생활을 유출하는 사람들도 많다. 바로 SNS를 통해서다. 유명인들이 공적 자리에서라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얘기를 SNS를 통해서 하다 뉴스가 되면서 화를 자초하곤 한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경우 구직자 가운데 상당수가 과거 SNS에 올린 글 이 문제가 돼 탈락한다. 왜 우리는 SNS에 일기를 쓰는 멍청한 짓을 할까.

이처럼 디지털 세계가 되면서 사람들이 사생활 유출 위험성을 점점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지만 정작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사생활 불일치(privacy

mismatch)’라고 부른다. 학술지 ‘사이언스’ 21일자에는 디지털 시대 사생활 유출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생활의 진화적 기원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기고문이 실렸다.

사생활 불일치는 진화적 불일치의 하나다. 진화적 불일치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킨 행동이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현상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만과 당뇨 같은 만성질환의 만연이다. 달고 기름진 음식에 탐닉하는 성향은 먹을거리가 들쑥날쑥했던 수렵채취인 시절 생존에 유리하게 진화한 결과이지만 음식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건강을 망치는 본능이 됐다. 사생활을 지키려는 본능 역시 디지털 시대의 위협은 간과하기 때문에 사생활 유출을 막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대응하지 못하는 본능

사생활을 지키고 싶은 마음의 뿌리는 인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동물은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상대의 감시를 피해 쉬면서 자신을 돌볼 여유를 가지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현대 동물원은 갇힌 동물들이 관람객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이런 조치가 없다면 동물은 만성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때로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하루에 얼마는 혼자이거나 편한 상대와 함께 하는 사적 시간을 가져야 심신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그리고 이런 사생활의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예를 들어 구내식당에서 직장 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상사 뒷담화를 하다 누군가가 옆을 지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춘다.

이런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이뤄져 때로는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기소개서를 쓸 때 창을 통해 옆방에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보이면 주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어차피 남이 읽으라고 쓰는 것임에도 누군가의 시선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는 행동을 꺼리게 만든다. 즉 사생활 정보 유출을 막으려는 행동은 타인의 감각 기관(주로 눈과 귀)이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에서는 내 사생활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할 물리적 대상이 없다. 혼자 있는 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면 상대가 주변 사람들과 같이 들을 수도 있고 녹음할 수도 있음에도 무의식적 본능은 주위에 아무도 없으므로 안전하다고 판단해 긴장을 놓는다. 설사 처음에는 조심하다가도 곧 방심하게 된다. 어린이집 곳곳에 CCTV가 돌아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 역시 무의식적 본능은 타인의 시선을 느낄 때처럼 카메라의 존재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행동과 의식적 행동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속성에 있다. 본능에 따르는 무의식적 행동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지속할 수 있다. 반면 노력해야 하는 의식적 행동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는 없다. 본능이 아니라 의지로 사생활 정보 유출을 막는 행동을 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사생활 불일치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아이폰은 통화 녹음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기업 스스로 더 많이 팔 수 있는 옵션을 뺀 것은 오늘날 사생활 제로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플코리아 제공

미국의 컴퓨터·소프트웨어 회사인 선마크로시스템스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였던 스콧 맥닐리는 1999년 일찌감치 디지털 시대에는 사생활이 없는 삶이 불가피하므로 인류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예상대로 사생활 제로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본능은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고문에서 저자들은 자동차에 빗대 설명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동차 성능이 좋아져 최고 속도가 점점 빨라지지만 운전자가 여기에 맞추다가는 교통사고 사망자가 급증할 것이다. 따라서 최고 속도를 법으로 정해 불일치가 일어나지 않게 한다. 사생활 정보를 유출할 수 있는 기술 또는 체계 역시 이런 식의 정책적 개입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이트에 가입하면서 정보를 입력할 때 디폴트(기본) 모드를 전체가 아니라 필수로 하고 선택 사항을 하나하나 클릭해 더하는 식으로 하면 원치 않는 사생활 정보 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심야시간대 SNS에 뭔가를 올리려고 할 때 ‘클릭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같은 문구를 옆에 넣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깊은 밤 아늑한 방에서 안심하고 있는 본능은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수많은 눈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부가 기술 적용을 막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은 나라에 따라 자동차 블랙박스 설치를 금지하거나 허용해도 영상을 공개할 수 없는 등 제한이 많다. 블랙박스가 취득한 정보로 교통사고의 잘잘못을 밝히는 데 도움을 얻는 것보다 원치 않는 녹화로 사생활이 침해되는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로는 기업이 자제하기도 한다. 애플이 그런 경우로 아이폰에 통화 녹음 기능을 넣지 않았다. 분명 판매에는 손해가 되겠지만 사생활 보호를 중요시하는 스티브 잡스의 철학이 남긴 유산일까. 애플은 고객의 비밀번호를 풀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안드로이드폰 사용자가 아이폰보다 3배 정도 많지만 유독 젊은 여성층만은 아이폰 사용자가 더 많다. 사생활 보호를 중시하는 애플을 높이 평가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생활 제로 시대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 아이폰을 선호하는 현상이 왠지 자연스러워 보인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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