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건설과 서울신문, 그리고 아마존과 워싱턴포스트

미디어오늘 2022. 1. 25.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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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1336호 사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1999년 9월30일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앞에서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탈세 혐의를 받았던 홍석현 전 중앙일보 대표이사가 검찰에 소환돼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일련의 무리가 차 뒤쪽에 도열해 있던 것이다.

홍 전 대표는 가벼운 미소를 보였는데, 조직 보스 안위를 걱정하는 듯 심각한 표정의 무리와는 대조를 이뤘다. 이들은 홍 전 대표를 향해 “힘내세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은 중앙일보 기자들이었다. 당시 이들 모습은 언론 사주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존재를 상징해 언론계에서 크게 회자됐다.

최근 서울신문 기사 삭제 '사태'가 벌어졌다. 이번 사태 본질은 간명하다. 기사 삭제가 서울신문이라는 언론 독립성을 침해했느냐 여부다.

서울신문이 대주주인 호반건설 비판 기사를 삭제한 것은 상생 차원 조치라는 주장과 편집권 침해라는 반발이 부닥치면서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두 주장의 간극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독자 신뢰를 먹고 사는 매체의 브랜드 이미지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관련기사 : 서울신문, “상생을 위한 판단” 호반 대해부 보도 일괄 삭제]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주주가 아니었을 때 보도됐던 검증 기사를 악의적 보도라고 규정하고, 이제 대주주가 됐으니 '상생'의 이름으로 삭제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잘못됐다.

서울신문이 대주주 비판을 하지 못하거나 대주주 방패막이로 나서 '호반신문'이 될 것이라는 체념적 전망이 쏟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비판 기사를 삭제하는 행태로 노골적으로 편집권을 침해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 서울신문과 호반건설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기사 삭제가 무슨 대수라도 되느냐는 듯한 서울신문 사주와 사장, 그리고 편집국장의 당당한 태도다.

서울신문 편집국장은 '편집권 문제가 아닌 상생을 위한 판단의 문제'라고 했다. 억지에 불과하다. 보잘것없는 기사라도 언론사 스스로 이를 삭제했다면 그 삭제 경위가 분명해야 한다. 대주주를 비판 혹은 검증한 기사 50여 건을 삭제하는 과정에 논의의 장이 없었다는 점에서 상생이라는 말은 옹졸한 변명에 가깝다.

“사실 나는 사장이 된 순간부터 호반 기사를 빼려고 했다”는 서울신문 사장의 입장은 앞으로도 대주주 호반 편에 서서 편집권을 주무르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또한 사장은 “경고한다. 두 번 기회는 없다”라며 편집권 침해 사태에 반발하는 이들을 겁박했다. 저널리즘 원칙에 대한 호소를 찍어누르는 행태에서 언론사 사장 자격을 의심케 한다.

김상열 호반그룹 회장은 호반 비판 보도를 “반론의 기회조차 없이 지속된 일방적 기사들”이라고 윽박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대주주 입김이 작용해 기사가 삭제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기사들의 진실성이 밝혀진다면 회장의 직권으로 해당 기사를 다시 게재하겠다”고 했다.

불난 데에 기름을 끼얹는 모습으로 돈이면 전부 해결 가능하다는 자본의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편집권도 건설자본 대주주 앞에선 한갓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식의 협박이다.

[관련기사: 호반그룹 회장 “사실관계 진실이면 서울신문 기사 되살리겠다”]

▲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서울신문 임원실 입구. 사진=김예리 기자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워싱턴포스트 사례를 보자.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열린 행사에 참여한 마틴 배런 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은 “워싱턴포스트는 베이조스(아마존 창립자 및 WP 사주)와 아마존에 관한 강력한 기사를 여러 번 보도했지만, 다행히 베이조스는 개입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 스토리를 비판하거나 억누른다거나 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배런 전 국장은 “우린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거의 망해가는 워싱턴포스트 인수를 결정하고 디지털 혁신으로 매체를 일으켜 세운 제프 베이조스가 더욱 큰 행운을 얻었다.

실리콘밸리 전문기자 브래드 스톤(Brad Stone)은 책 '아마존 언바운드'에서 베이조스를 세계 50대 지도자 명단(2016년 미국 경제 잡지 포천이 선정)에 올린 것은 “신문사 하나를 도와주고 나서”였다면서 “그 역시 저널리즘이라는 고결한 사명에서 퍼져 나온 불빛에 혜택을 봤다”고 했다.

편집과 경영 분리라는 언론의 운용 원칙을 지킨 대주주와 매체는 독자는 물론 소비자 신뢰까지 얻었다는 얘기다. 서울신문 경영진은 이번 기사 삭제 사태로 인해 무엇을 잃었는지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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