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포비아’

김태훈 논설위원 2022. 1. 2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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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우크라이나는 피를 나누고 역사를 공유한 형제다. 두 나라의 뿌리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9세기에 등장한 키예프 공국이다. 조상도 스칸디나비아에서 이주해 온 루스족(族)으로 같다. 레닌과 함께 소비에트 혁명을 주도한 트로츠키 전 소련 외상과 브레즈네프 전 서기장은 모두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러시아가 자국 영토인 크림반도를 1954년 우크라이나에 넘긴 것도 두 나라 사이에 경계따윈 필요 없다는 형제애의 발로였다.

▶러시아는 ‘루스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도 한때 ‘우크라이나 루스’를 자처했다. 더는 아니다. 우크라이나 흑토(黑土) 지대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북미 프레리와 함께 세계 3대 곡창지대다. 비료 없이도 곡식이 자란다. 그런데 1930년대 스탈린이 밀어붙인 집단농장 실패로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스탈린은 흑토에서 난 농작물을 팔아 러시아 산업화 밑천으로도 썼다. 푸틴은 크림반도를 도로 빼앗았다. 두 나라는 원수가 됐다.

▶우크라이나의 ‘크라이나’는 ‘땅’ 또는 ‘변경’이란 뜻이다. 강대국들 사이에 낀 지정학적 상황이 국명에 들어 있다. 그로 인한 고통이 컸다. 러시아 등 주변 유럽 국가들에 여러 번 분할 점령당했다. 2차대전 때는 ‘유럽의 빵 공장’을 노리는 히틀러와 ‘러시아의 식량 창고’를 지키려는 스탈린 사이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드넓은 평야에 밀 대신 피가 흥건했다.

▶친서방 노선을 택한 우크라이나가 서유럽 군사동맹인 나토(NATO)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좌시하지 않겠다며 무력을 앞세워 위협하고 있다. 미국은 엊그제 자국 대사관 직원 가족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루스의 혈통’으로 다시 묶이기를 거부한다. 우크라이나 국민 64%가 나토 가입을 바란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1989년 민주화 벨벳 혁명을 시작한 체코의 모토가 ‘유럽으로의 복귀’였다. 러시아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유럽연합(EU) 가입도 추진했다. 법치·시민권·자유에 대한 서유럽 기준을 충족하는 문명국이 되겠다는 염원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은 지금도 러시아 포비아(공포증)를 토로한다. 훈련차 온 미군에게 이들 나라 국민은 ‘당신은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 환영했다. 푸틴은 지금 옛 소련의 영토를 야금야금 되찾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한다. 피를 나눈 이웃의 마음도 얻지 못하는 나라, 함께했던 다른 나라들이 몸서리치는 그런 나라의 ‘영광’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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