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문 - 김용 [김동현의 내 인생의 책 ①]
[경향신문]
이제는 볼 수 있다. 교실 바닥에 넘어져 동급생의 발길질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었던 열네 살의 소년을. 독서실 옥상으로 끌려가 벗겨진 바지를 애써 올리며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그날 밤 별은 유난히 먼 데서 빛났다.
끝을 알 수 없는 모멸감에 떨었던 중학 시절, 나는 틈만 나면 책의 세계로 도망갔다. 읽고 있는 동안만 잊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월부 책장사에게 구입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세로로 쓰인 작은 활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두꺼운 전집에 질릴 때쯤 집 근처 경찰청 도서관에서 김용을 만났다. 대민서비스 차원에서 민원실 2층을 작은 도서관으로 꾸몄던 것 같다. 구색을 갖추기 위한 시설이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곽정, 양과, 황용의 이야기는 세계문학전집과는 다른 놀라운 신세계였다. <영웅문>이라는 다락방에서 나는 지긋지긋한 폭력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사파(邪派)의 암수에 내상을 입은 사춘기를 무협의 내공으로 건너가고 싶었던 때문이었을까. 경공(輕功)을 익히는 무예의 비급이 담긴 구음진경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무공의 춤사위로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은 여전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폭력의 주화입마(走火入魔)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축지법으로 세상을 넘을 수는 없었다. 회피와 외면으로 상처를 잊을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나는 몸만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망해버린 출판사 고려원이 정식 계약 없이 <영웅문>을 발간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위법의 축복’도 나쁘지 않았다. 그 시절 불온의 활자들에게 뒤늦은 인사를….
김동현 | 문학평론가·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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