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탈인간] 우리에겐 꿀잠이 필요하다

한겨레 2022. 1. 23. 18: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수면의 과학에 대한 글을 기대한 독자에겐 미안하지만, 꿀잠이란 이름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내 집 없는 한 명의 시민 활동가로서 서울에 사는 처지는 길고양이의 그것과 닮았다.

영등포 신길파출소 골목을 따라 걸으면 왼편에 보이는 아담한 4층짜리 건물 한편에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인정을 대가 없이 베푸는 곳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 힘들지만, 매년 4천명이 다녀가는 엄연히 현존하는 쉼터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한민의 탈인간]

‘비정규노동자쉼터 꿀잠’ 상근활동가, 효성첨단소재 해고노동자, 인권활동가 등이 서울 영등포 신길동 꿀잠 옥상에서 휴대폰 불빛을 밝히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수면의 과학에 대한 글을 기대한 독자에겐 미안하지만, 꿀잠이란 이름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내 집 없는 한 명의 시민 활동가로서 서울에 사는 처지는 길고양이의 그것과 닮았다. “저 수두룩빽빽한 공간 중에 나를 반길 곳 하나 없구나!” 물론 공간을 꼭 소유할 필욘 없다. 빌려 쓸 수만 있어도 다행이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거나, 지방에서 온 활동가들은 운신할 곳이 없어 늘 고충이 크다.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발언, 대중이 반기지 않는 운동에 연루된 이들은 환대받고 싶은 동물로서의 본능을 포기하고 산 지 오래다. 이들에게 5년여 전 탄생한 환대의 장소는 반가움 그 자체였다.

영등포 신길파출소 골목을 따라 걸으면 왼편에 보이는 아담한 4층짜리 건물 한편에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노동운동가들이 주로 오지만 장애인 운동이든 기후정의 운동이든, 자본이 아닌 약자·공동체를 위한 일을 도모하는 누구나 환영한다. 무료 숙식이 가능함은 물론 모임도 하고, 강연도 듣고, 전시도 보고, 차 한잔하며 숨돌릴 수 있는 ‘여름방학 외갓집 같은’ 곳. 심지어 치과·한방 치료까지 제공한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인정을 대가 없이 베푸는 곳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 힘들지만, 매년 4천명이 다녀가는 엄연히 현존하는 쉼터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많은 이들이 도왔다. 전국 각지에서 받은 후원으로 낡은 건물을 인수해 철거부터 인테리어까지 천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한땀 한땀 일궈냈다. 구석마다 넘치는 사연과 이야기, 번득이는 공간 활용 지혜, 다음 사람을 배려해 아껴 쓴 게 역력한 흔적들을 보면 앞으로 백년도 끄떡없겠더라…고 얘길 끝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이어진다. 꿀잠이 위치한 지역이 재개발된단다.

잘된 일 아니냐, 보상 잘 챙겨 이주하면 되지 않냐고 할지도 모른다. 꿀잠에 못 가봐서 하는 소리다. 수천개의 손길이 쌓아온 의미와 공공성을 어떻게 교환가치로 환원하겠나? 자연 생태계에도 멸종위기종은 서식지를 쉽게 못 바꾸는 토착종이 많은데, 이들을 새 환경에 이식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생명이 주위 환경과 맺는 관계는 단순한 요소들의 총합 이상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기억, 의미, 역사… 당장의 이익 앞에 사치처럼 들린다면, 가치를 사치로 치부하고 얻는 본질은 무엇인가?

꿀잠과 같은 수많은 ‘기억의 장소’를 위협하는 재개발 열풍은 사회적 주거라는 개념의 소멸과 궤를 같이한다. 이계수·김명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국가의 각자도생식 ‘자가 소유 전략’에 포섭됐다. 전세계적 민영화가 본격화된 1990년대에 공영주택이 대량 매각될 때 우리도 이 흐름을 막지 못했다. 시민·노동 운동도 주거를 사회적 권리로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택가격 합리화나 임금 교섭을 통해, 즉 사적 소유의 형평성을 확보하는 식으로 접근하면서 공공재로서의 도시나 집단 주거의 모색은 사라졌다. 그렇게 우린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을 당연시하고, 재개발 소식에 가슴이 뛰는 ‘개발 괴물’의 아바타가 되어갔다. 명분만 번지르르한 개발사업들이 실상은 원주민을 축출하는 투기판이자 도심공동화의 주범으로 전락한 사실을, 아무리 공급을 늘려봤자 상위 몇퍼센트의 투기세력·자본가만 재미를 보고 다수의 사회적 약자는 빈곤해지고 주변화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거짓 환상의 제물을 자처하면서 말이다. 획일적인 고층아파트촌에 갇혀 공간적 상상력이 황폐화된 건 덤이다. 이제 환상을 깨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싹쓸이식 재개발이 아니다. 켜켜이 쌓인 공공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진정한 도시재생, 투기자본이 조장한 광풍에 휩쓸리지 않을 권리, ‘사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환대의 장소들이다. 더 많은 꿀잠들이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