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으로 질주하는 100분..욕망으로 뒤틀린 피의 군주 '리차드 3세'로 돌아온 황정민 [리뷰]

선명수 기자 2022. 1. 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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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연극 <리차드3세>의 한 장면. 배우 황정민이 욕망으로 뒤틀린 악인, 리차드 3세를 연기한다. 샘컴퍼니 제공


어둠 속, 선명한 빛 한 줄기가 왕좌를 비춘다. 암전 후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위에 이윽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굽은 등과 잔뜩 움츠린 어깨, 비틀린 듯 꺾인 왼팔을 흔들며 등장한 남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희대의 악인’이었던 리차드 3세. 냉소적으로 이죽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극장을 울린다.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그래서인가? 절름대며 걷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전쟁터에서 승리를 이끌었지만, 저기 오고 가는 수많은 덕담 속에 내 이름은 벌써 사라졌어. (…) 난 뒤틀린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듯,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세상에 내가 다른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나 리차드는, 이 순간 이후부터 저들보다 더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때론 웃으면서, 때론 동정과 연민의 눈물도 흘리면서. 때론 유쾌하게, 때론 엄격하게. 때론 사랑스럽고 때론 마초적으로. 세상을 속일 명연기로도 내가 저 왕관을 가질 수 없다면, 그 땐 조금 더, 더, 더 악해지면 되겠지.”

서늘한 기운을 온 몸으로 뿜어내며 무대를 종횡무진 오가는 남자, 리차드 3세로 분한 황정민은 강렬한 연기로 100분간 관객을 사로잡는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리차드 3세>가 4년 만에 다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영국 장미전쟁 시대 실존 인물이었던 요크가의 마지막 왕 리차드 3세의 왕좌를 향한 광기어린 폭주를 그린 연극이다.

리차드는 볼품 없는 외모와 신체적 장애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으로 왕좌를 향해 돌진한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형의 왕위를 위해 싸웠지만 누구의 인정도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잊힌 사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으니 그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고자 한다. 계략을 세워 두 형을 죽음으로 내몰고, 친형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막후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리차드는 왕비의 친인척과 어린 조카들, 반대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스스로 왕관을 쓴다.

콤플렉스로 뒤틀려 있는 이 악인은 좀처럼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 앞에 당당하고,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고 선언한다. 피의 군주는 욕망을 무기 삼아 진군한다. 요크 가문에 멸문지화를 당한 미치광이 왕비 마가렛의 “피로 이룬 것은 피로 잃을 것이다”라는 섬뜩한 예언처럼, 연극은 예정된 파국을 향해 서서히 나아간다.

연극 <리차드3세>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연극 <리차드3세>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욕망으로 폭주하는 리차드를 황정민은 때론 기괴하고 소름끼치게, 때로는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잔뜩 구부린 등과 꺾인 왼손은 100분 내내 펴지지 않고, 광기어린 눈빛으로 살의를 불태우다가도 이내 아이처럼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무자비한 악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잔혹함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발산하는 그의 다층적인 연기에 객석 역시 이내 사로잡힌다.

2018년 초연한 <리차드3세>는 황정민의 10년 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연극학도일 때 선배들이 올린 고전극을 동경했고 그만큼 고전의 힘을 알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클래식의 위대함이 사라져서 안타까웠다”면서 “관객들뿐만 아니라 연극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고전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터미션 없이 100분간 진행되는 연극이지만 속도감 있는 연출로 관객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리차드의 정적들이 하나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무대 뒤 설치된 대형 스크린 속 영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극의 후반, 이 ‘피의 질주’로 희생된 이들이 리차드의 환영으로 등장하는 장면 역시 일그러진 영상 이미지가 강렬함을 더한다. 주인공 리차드 3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연극이지만, 비운의 왕비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는 장영남, 예언과 저주를 쏟아내는 마가렛 왕비를 연기하는 소리꾼 겸 배우 정은혜 등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도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연극 <리차드3세>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극의 말미, 끝을 모르고 질주하던 리차드 3세는 결국 “내가 지은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는 절규와 함께 무덤으로 변한 무대와 하강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변한 무대 위에서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고 묻는 살아남은 자, 마가렛의 목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연극의 묘미는 커튼콜에도 있다. 리차드 3세의 모습으로 무대 끝에서 달려오던 배우가 그제서야 움츠렸던 몸을 펴고 다시 배우 황정민으로 돌아온 순간, 객석에선 어느 때보다 긴 박수가 터져나왔다. 공연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2월13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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