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환자는 '건강 비밀'을 함께 알아가는 동료

한겨레 입력 2022. 1. 22. 20:16 수정 2022. 1. 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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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남의 집 드나드는 닥터홍 _ 들으면 힘이 나는 말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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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몸이 좋아져서 안 오셔도 되겠어요. 다음에 힘들 때 전화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휘찬(가명)님은 한달 전 병원에 전화하여 방문 진료를 요청하였다. 지체 장애와 언어 장애가 있다고 하는데 갑작스레 거동이 어려워져 고혈압, 고지혈증 등 만성질환 관리를 부탁하셨다. 약이 한달분 남았다고 하여 약이 떨어질 때쯤 찾아뵙기로 하였다. 잊지 않도록 달력에 적어두었다가 일정을 맞춰서 휘찬님께 전화를 드렸다. 한달 전 통화 때만 해도 힘이 없는,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였는데 시간이 흐르고 전화를 하니 휘찬님의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뵌 적은 없고 전화 통화만 몇번 했을 뿐인데 몸이 좋아져서 안 와도 된다고 하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몸이 좋아졌으니 좋은 일이었다. 좋아졌다는 소식,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힘이 난다.

예상치 못한 희소식

“어제 병원에 갔는데, 못 들어오게 내쫓더라고. 지팡이로 때리려다 말고 그냥 왔어. 내가 거기 건물 하나 있을 때부터 다녔는데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석춘(가명)님은 80대 후반의 어르신으로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구청, 복지관 등에서 여러모로 신경 쓰고 있는 분이라고만 듣고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구청 사회복지사 의뢰로 함께 찾아가게 되었다. 평생 다닌 대학병원에 찾아갔는데 진료도 못 받고 문전박대를 당해서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꺼내신다. 우리도 내막이 궁금해서 왜 그랬는지 계속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원래 예약 날짜가 아닌 날 갑작스럽게 진료를 받고자 찾아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거절한 것이었다.

“어르신, 요즘 코로나 때문에 대학병원에 예약 없이 찾아가면 못 들어가요.”(나)

“그래? 예약 날짜가 아니었어? 나는 아프니까 간 거였지.”(석춘님)

고령에 인지 저하가 있지만 오랜 기간 다닌 병원까지 먼 길을 신기하게 잘 찾아다닌다. 지금은 병원이 더 커져서 가던 길도 더 복잡할 텐데 말이다.

“어르신, 다음주 화요일이 예약한 날짜니까, 저랑 같이 가요.”

동행한 구청의 사회복지사는 아무래도 자기가 같이 가서 담당 교수님은 어떤 소견이신지 듣고 와야겠다고 한다. 석춘님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담당 교수님께 전하기로 했다.

석춘님은 최근 인지 저하가 심해졌다. 폭력성이 증가해 자기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지팡이가 올라간다. 동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단지 내 복지관에서도 석춘님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전에 만났던 그분이 맞나?

그 와중에 내가 방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차근차근 그동안 석춘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며 먹는 약을 살펴보았다. 약을 드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나 다용도실을 보니 그동안 받고 먹지 않은 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석춘님의 얘기를 잘 듣고, 집 안을 둘러보면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석춘님과 요양보호사, 그리고 사회복지사와 약 더미를 같이 보며 차근차근 약을 잘 먹자고 합의를 하였다. 약을 잘 먹으면 다소 폭력성이 누그러졌을 텐데 그동안 약을 제때 먹지 않아서 문제인 걸로 보인다. 석춘님의 폭력성과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요양보호사도 자주 바뀌는 상황인데 이번 요양보호사님께 약 복용을 잘 돕자고 신신당부드렸다.

그렇게 2주쯤 지나고 근처 방문 진료를 왔다가 석춘님이 생각나서 잠시 들렀다. 혹시 나를 잊었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기억하신다. 첫 방문 때 외출해서 만나지 못했던 딸이 함께 있다.

“우리 딸인데, 젊었을 때 나쁜 사람에게 맞아서 머리를 다쳐서 이래요.”

장애가 있는 따님도 애초에 함께 진료를 의뢰받았던 터였다. 따님과도 인사 나누고 잠시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딸에게도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인다.

“다음에 오시면 우리 딸도 진찰해주세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석춘님은 내가 나오는 길에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그 전에 만났던 석춘님이 맞는지 의아하다. 그동안의 상황이 궁금해서 복지사님께 전화를 드리니, 요양보호사님이 약 복용을 잘 챙겨주셔서 석춘님이 다소 안정적이고 폭력성도 줄어들었다고 하신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약이 조금 효과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와서 다음 집으로 움직이기 전에 잠시 멈춰 ‘감사하다는 말을 몇번이나 들었지’ 하고 세어본다. 예상치 못하게 ‘고맙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연신 듣고 또 사회복지사님께 석춘님이 다소 안정적이라는 말을 들으니 다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상호 보완의 존재들

의사로서 일을 하다 보면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는 경우보다 악화하는 상황이 보통 많은데, 휘찬님과 석춘님의 경우처럼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없던 힘이 생긴다. 새삼 내가 만나는 분들과 내가 상호 보완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번의 전화 통화만으로도 몸이 좋아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분명히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차분히 대화로 소통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전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내가 일방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분들과 아픔의 공유를 통해 나 또한 배운다. 우리가 ‘건강’이라는 비밀을 함께 알아가는 동료라는 생각이 든다. 그 동료들과 함께 더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실수 연발이지만 서로 믿고 의지하면 없던 길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본다.

홍종원 | 찾아가는 의사.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꿈도 계획도 없다. 내 집도 남이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 고마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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