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와 차별화".. 日 '새로운 자본주의' 물결 넘실거린다 [세계는 지금]
빈부 격차 줄이고 소비·투자 활성화 내용
자민당 총재 선거 때부터 간판 정책으로
집권 첫 시정연설서 '경제 재생 요체' 규정
다보스포럼선 각국 지도자에 의지 피력
새해 들어서 예산·정책에 반영 등 구체화
임금 인상 통한 '분배·성장 선순환' 구상
최저임금부터 1000엔 이상으로 인상 방침
노조 신년행사 참석 등 노동계와 스킨십
"일본판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작용"
'상왕' 아베와의 차별화로 해석되기도
지난 1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집권 후 첫 시정연설에서 분배를 통해 격차를 줄이고 중산층을 더욱 두껍게 해 소비, 기업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재차 강조했다. ‘역사적 규모’, ‘세계 흐름의 주도’ 등을 운운한 화려한 수식은 그가 이 정책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8일 밤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설에서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앞에 두고 이런 의지를 강조했다.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 강조는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지난해의 자민당 총재 선거, 총리 취임 후 중의원 선거 과정에서 ‘성장’과 ‘분배’ 모두를 잡겠다며 간판 정책으로 밀어붙였다. 새해 들어서는 이런 구상을 예산과 정책에 반영하고, 각 경제주체에 대한 압박 혹은 설득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주목할 지점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일본 정계의 ‘최대 주주’이자 때로 ‘상왕’처럼 군림하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탈아베’ 노선의 상징처럼 해석된다는 점이다. 일본의 변화를 가늠해 보기 위해 새로운 자본주의의 추진 과정과 성공 여부를 유심히 들여다 봐야 하는 이유다.
◆“공세적 임금인상”… 기시다, 연일 ‘새로운 자본주의’ 강조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핵심 과제로 여겨지는 것이 임금 인상이다. 임금을 올려 적극적인 분배를 현실화하고, 늘어난 소득이 소비로 이어지도록 성장을 이끄는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을 이룬다는 구상인 셈이다. 기시다 총리는 5일 경제3단체와의 신년축하회 인사말에서 “일본경제의 국면 전환에 탄력을 주기 위해서도 임금 인상에 협력해주기를 바란다”며 “임금 인상에 대한 공세적 자세”를 요청했다. 임금 인상을 약속한 기업 지원책도 내놓았다. 임금 인상을 약속한 기업에 4월 이후 정부의 물품·서비스 조달과 공공사업 등에서 5∼10%의 가산점을 주겠다는 것. 17일 시정연설에서는 전국 평균 최저임금을 가급적 빨리 시간당 1000엔(약 1만400원)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재 최저임금은 930엔이다.
임금 인상과 더불어 ‘디지털 활용을 통한 지방 활성화’, ‘대규모 스타트업 창업을 통한 제2의 창업기 실현’, ‘양육, 젊은 층에 초점을 맞춘 세대 소득 증대’, ‘비정규직 처우 개선’, ‘전 세대 사회보장제도 구축’ 등이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의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정책에 중점을 둔” 107조5900여 억엔의 2022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이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성장의 과실이 사회 전 계층으로 확대되지 않고 격차를 심화했다는 문제 의식이 깔려 있다. 일본에선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래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해 아베 정권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베 전 총리가 2차 집권(2012∼2020년) 기간 동안 추진한 경제정책, 이른바 ‘아베노믹스’는 대규모 금융완화와 재정지출 확대, 공격적인 성장전략을 축으로 주가 상승과 기업 이윤 확대 등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고소득층이나 대기업이 거둔 경제적 과실이 소비와 투자를 늘려 저소득층까지 윤택하게 만드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른바 ‘낙수효과’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실질임금 하락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기업들은 이윤을 내부유보금으로 쌓아놓고 노동자에게 나눠주지 않다보니 실질임금은 2015년을 100으로 봤을 때 2012년 105.3이던 것이 2019년 99.6으로 감소했다.
일본 야당은 아베노믹스를 실패작으로 규정짓는다. 아베노믹스로 고용 문제가 개선되었다는 평가조차도 비정규직을 양산해 노동시장의 격차만 심화했다고 본다. 총무성에 따르면 2013∼2019년 7년간 생긴 447만건의 신규고용 중 비정규직이 254만건(56.8%)을 차지한다. 대졸자 취업이 나아졌다는 것도 2011∼2013년 베이붐세대 330만명이 은퇴하면서 생긴 착시효과라는 분석이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이런 상황을 큰 변화를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이런 정책의 구상과 추진이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을 이끌며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아베 전 총리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보려는 해석이 흥미롭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숙원인 헌법 개정 등에서 보조를 맞추며 협력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 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는 말은 기시다 총리의 집권 이후 끊이지 않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재직 당시 코로나19 방역대책의 하나로 만들었던 이른바 ‘아베노마스크’의 폐기를 결정한 것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통한다. 중국에 유화적일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아베 전 총리가 반대한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의 임명을 강행한 것도 ‘탈아베’ 의지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성장을 중시하는 아베노믹스와는 지향점이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대표 정책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베 전 총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근본적인 방향은 아베노믹스에서 수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라고 인식되어 버리면 시장의 반응도 좋지 않을 것이다. 성장에서 눈을 돌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일본 정치에서 전직 총리가 현직 총리에게 공개적으로 훈수를 두는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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