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보수'의 탄생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진보는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 강준만 교수가 2014년에 쓴 책 <싸가지 없는 진보>가 반향을 일으키며 이 말은 유행처럼 돌았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시절이었고, 2007년, 2012년 대선에서 두번 연속 패했다.
'싸가지론'은 거기서 나왔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1219 끝이 시작이다>라는 책을 내어 반성과 함께 패배 원인을 스스로 따졌다. 그때 문 대통령이 책에 쓴 말,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다"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말이 등장한다. 강준만 교수는 2014년에 이어, 민주당이 집권한 이후인 2021년에 또 다시 <싸가지 없는 정치>를 내어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민주당=진보'의 등식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일단 이 글에서 '진보'는 세칭 '보수 정당'의 반대 진영, 즉 민주당을 의미한다고 해 두자.
강준만 교수가 언급한 '싸가지론'이란 건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어떤 행동을 두고 '저 행동은 싸가지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의 답변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 상대 진영을 가르치려 드는 태도, 상대 진영에 대해 합리적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고 희화화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통칭할 수 있겠다. 강준만 교수는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인관계에서는 아주 매너가 좋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정말 올곧고 이타적이면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는데 정말 싸가지 없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예를 든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즉 '태도'를 짚어 냈다. 영어로 하자면 '매너스(Manners)' 정도가 어울릴 듯 하다. '싸가지 없게 살지 말라'는 말은 영화 <킹스맨>의 유명한 대사 "Manners makyth man"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에서 '매너스'는 인간의 지적, 감성적 자세는 물론, 신체적인 태도와 습관 등을 종합적으로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싸가지론'은 진보 진영을 비판하는 전유물 같은 것처럼 여겨져 왔다. 강준만 교수가 <싸가지 없는 정치>를 낸 것도 민주당 진영이 '싸가지 없음'을 극복한 게 아니고 '싸가지 없는' 국정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판단일 것이다. 평가는 그의 자유다.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의 싸가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해 볼만 한 시대가 온 것 같다는 점 때문이다. 보수 정당 대표에 선출된 이준석의 등장 이후였던 것 같다. 강준만 교수는 지난해 9월 24일 방송 인터뷰에서 이준석 대표를 향해 "(과거에는) 싸가지 없는 게 매력이었다"며 "지난 한 10년간 아주 치열하게 노력해 왔는데, 그 10년간의 경험을 이제 당대표가 된 이후에 약간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의와 명분이 있을 때 싸가지 없는 건 이거는 당찬 도전이다. 그게 (싸가지) 면책특권이다. 그런데 그게 쏙 빠져버린 채 싸가지 없게 굴면 이건 욕먹는 것"이라며 "당대표가 되고 나서 그런 게 보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싸가지가 보통 비교적 약자인 사람이 싸가지가 없게 구는 것"이라며 "(당대표는) 권력자다"라고 지적했다. 권력자가 된 후엔 강자가 되므로 '싸가지 없게 구는 것'은 더이상 좋은 '매너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간 강 교수의 이런 지적을 마음에 새겨 오다가, '싸가지 없는 보수'를 좀 더 본격적으로 느낀 것은 지난 7일 올라온 '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 윤석열 후보 페이스북 글귀 덕분이었다. 이준석 대표와 화해를 한 이후 윤석열 후보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해졌다. 모호함의 여지를 두지 않는 것, 그리고 (실제 그런 것인지와 별개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 내 편과 상대편을 정확히 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문구에 동의하는 자들만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모호함' 속에 남아 있거나, 선명한 문구(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쳐내고, 그 문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역시 쳐내고, 그 짧은 문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과는 함께 하지 않는다, 이런 선언같은 것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글자는 논리가 없고 구호만 있으니 토론이 되지 않는다. 이런 '갈라치기 전략'은 꽤 재미를 봤다. 이준석 대표는 10일 "이틀 걸렸군"이라는 의미심장한 다섯글자를 올렸다. 특히 20대 30대 남성들이 주로 모여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구호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한발 더 나아가 윤석열 후보 선대위에서 정책을 담당한다는 하태경 의원은 아예 페미니즘을 '불법적 사상'으로 몰아 넣는다. 과거 '색깔론'은 이제 페미니즘으로 옮겨왔고, 그는 "페미니즘 자체가 반헌법적 이념"이라고 주장했다. 페미니즘을 대하는 이런 태도에서는, '정체성 정치'의 희생자라 생각하는 일부 '세력'을 포섭해 '희생자 정체성'을 만들어 다시 '정체성 정치'를 공격하는 악순환의 면모도 엿보인다.
"복어 독 좀 드셨습니까."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최근 선거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우려스러운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남녀갈등, 세대갈등을 부추기는 것이 그렇다"고 비판하자 이준석 대표는 이렇게 응수한다. '복어 독'은 그가 페미니즘을 언급할 때 쓰는 비유다. 이 대표는 페미니즘을 다루는 것에 대해 "그냥 복어요리 자격 없는 분이 주변의 꼬임에 따라 복어알을 한 숟가락 입에 넣는 과정"이라며 "정치인들이 그것(젠더 이슈)을 갈등 유발의 도구로 쓰는 순간 복어의 독이 된다"라고 거침없이 비유한다. 즉, 자신은 '복어 독'을 다룰 줄 아는 전문 요리사다.
여기에서 문제는 '반헌법적 사상'이자 '복어 독'인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냐다. 그들은 '반헌법'을 추구하는 '적'으로 간주됐다.
윤석열 후보와 일부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보여준 '멸공 챌린지'도 그렇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일부 지지자들은 '멸공'을 외치면서 '멸공'의 기치 아래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된 시민들과, 그들의 트라우마를 조롱하는 댓글들을 놀이처럼 달게 두었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하는 '밭갈이'의 책임론은 거론하면서 정작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하는 '멸공 놀이'와 '반페미니즘 놀이'는 방치한다.) 한때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에 기여했다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대하는 이준석 대표의 태도도 고운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이준석 대표는 '세대 포위론'이란 말을 거침없이 쓰면서 "부모를 설득하라.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외친다. 우리는 옳으니, 너희는 따라와야 한다는 태도다. '20대와 그들의 부모 세대의 지지를 끌어 올려 '30대, 40대, 일부 50대'를 포위한다는 것이다. 세대 갈라치기를 '선거 전략'이란 이름으로 승화시킨다.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은 반등에 성공했다. 일단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가 페미니즘, 공산당 등 대한 20대 남성의 분노와 증오를 이용한 방식은 꽤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분노와 증오를 이용하는 것은 선거 수단이다. 분노와 증오의 힘으로 그들은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싸가지 없는 진보'가 "약자를 위한다"는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 진영을 대하다 '내로남불'의 수렁에 빠졌다면, 지금 '싸가지 없는 보수'는 '위선을 발가벗기겠다'며 '약자는 바로 우리'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불지피고 있다.
'싸가지 없는 진보'와 싸우느라 스스로 '싸가지 없는 보수'가 된 것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싸가지 없는 진보'가 '싸가지 없는 보수'를 초래한 것일 지 모르겠다.
이 글은 보수와 이준석 대표의 싸가지 없음에 대해 비판하려는 글이 아니다. 이제 그들도 '싸가지 없음'의 세계로 들어왔고, 그 전략이 어떻게 대선 캠페인에 영향을 미칠지 궁금할 뿐이다. 실제 대선 결과에에도 마찬가지이며, 만약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떤 '매너스(Manners)'을 취하게 될 지가 궁금할 뿐이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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