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아드..경건한 분들을 격노케 한 '반체제 싱어 송라이터'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 ②]
[경향신문]
■노래하는 음유시인과 떠돌이 예인들
‘중세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트루바두르(Troubadour)와 트루베르(Trouvere)는 11세기 말에 출현해 13세기까지 활약했다. 프랑스 남부를 거점으로 삼았던 트루바두르가 50년쯤 먼저 태동했다. 트루베르는 이보다 한발 늦게 등장해 프랑스 북부에서 주로 활약했다. 독일 지역에서는 이런 이들을 민네쟁어(Minnesanger)라고 불렀다. 물론 그들의 시대가 13세기에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최후의 트루바두르’로 불리는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가 1377년까지 살았으니 14세기 후반까지 명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한마디로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시를 지어 직접 곡을 붙였다. 전해지는 회화 작품이나 필사본의 삽화 등에 따르면 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프나 비엘, 류트 같은 악기들이었다. 반주 없이 목소리만으로 노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악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의 노래는 오늘처럼 음역이 넓지 않았다. 같은 시대의 가톨릭 성가들이 그랬듯이 대체로 1옥타브 안에서 움직였다. 오늘날의 음악에 견준다면 다이내믹(음량의 대비)도 크지 않았다.
자,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세밀히 살필 지점이 있다. 트루바두르(트루베르) 중에 어떤 이들은 시를 쓰고 작곡하는 것에는 뛰어났으나 가창력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악기 연주에 능숙한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했을까. 노래를 지을 수는 있었으되 직접 부르고 연주하는 것에 곤혹스러웠던 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노래와 연주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등장하는 가수 겸 연주자를 ‘종글뢰르’(Jongleur)라고 한다. 오늘로 치자면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노래하는 가수, 혹은 악기 연주자라고 볼 수 있다. 1957년에 처음 출간돼 지금까지도 그 권위를 자랑하는 <라루스 세계음악사전>(탐구당)은 종글뢰르에 대해 “12세기의 세속가곡 분야에서 트루바두르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보수를 얻기 위해 각지와 성(城)을 떠돌아다녔던 단순한 연주가들”이라고 설명한다. “메네스트렐(Menestrel)이라고도 불렸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종글뢰르는 다만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노래와 연주’는 종글뢰르가 보여줬던 여러 기예 가운데 일부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종글뢰르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 가장 풍부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은 프랑스의 중세문학 전문가인 미셸 쟁크(1945~)의 <중세, 사랑과 매혹의 노래>(고려대 출판문화원)에 등장한다. 옮긴이 김준현 교수(고려대 불문학과)가 책의 해제에서 중세문학 연구의 거장인 에드몽 파랄(1882~1958)의 글을 인용해 종글뢰르의 정체를 설명한다. 결례를 무릅쓰고 원문을 발췌·요약하자면 이렇다. “종글뢰르는 다면적 존재다. 악사, 시인, 배우, 곡예사, 춤꾼이다. 길거리를 떠돌며 공연하는 방랑자다. 갈림길에서 군중을 즐겁게 하는 약장수다. 흥을 돋우는 이야기꾼이자 노래꾼이다.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곡마사, 불을 집어삼키고 사지(四肢)를 자유자재로 비트는 곡예사다. 마임을 뽐내는 어릿광대다. 익살꾼이다. 그 모든 것이면서 또 다른 것들이다.”
중세의 예술이나 음악에 관한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다. ‘가톨릭교회’라는 주류를 벗어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다보니 중세의 세속 음악을 설명하는 각종 문헌들은 그 내용이 서로 엇갈리는 경우들이 잦다. 어찌 보면 앞을 못 보는 이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전공자들에게서도 개념과 설명이 각기 다른 경우들을 왕왕 목격한다. 그래서 감히 고백하거니와, 앞서 인용한 알레그로 템포의 문장들이야말로 지금까지 접했던 종글뢰르에 대한 설명 가운데 가장 적확해 보인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그들은 떠돌이 풍각쟁이였고 당대의 엔터테이너였다. 물론 고달프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 조선 시대의 또랑광대들이 그랬듯이 세상의 밑바닥을 전전했다.
■‘골리아드’ 엘리트 보헤미안 음악가들
주지하다시피 중세 음악의 중심은 교회였다. 지엄하신 신의 거처는 악기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목소리만으로 예배해야 했다. 하지만 세속 음악가들은 악기에 대해 어떤 터부도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악기의 보존과 개량, 연주법의 발달에 기여한 쪽은 세속 음악가들이었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민네쟁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악기에 능숙했다. ‘떠돌이 광대’ 종글뢰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악기의 달인(達人)들이었다. 이처럼 오늘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악기들을 연주하거나 개량했던 이들은 교회 바깥에 존재했다. 악기의 모천(母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였지만 그 꽃들이 활짝 피어난 곳은 중세 후반기의 유럽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윌 듀런트(1885~1981)는 <문명 이야기>(민음사)에서 이런 언급을 남긴다. “놀랍게도 중세에는 다양한 악기가 존재했다. 타악기로 종과 심벌즈, 탬버린, 트라이앵글, 드럼 등이 있었고 현악기로는 리라와 키타라, 하프, 프살테리움, 오르가니스트룸, 류트, 기타, 비엘, 비올라, 모노코드, 지그가 있었다. 관악기로는 파이프와 플루트, 오보에, 백파이프, 클라리온, 플라지올레토, 트럼펫, 호른, 오르간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수백가지 악기가 더 있다. (…) 중세가 지옥에 떨어진 듯 음울하다는 생각은 중세의 악기들 앞에서 모두 사라진다.”
종글뢰르만 떠돌이 예인(藝人)이었던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방랑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갖가지 기예(技藝)로 오락을 제공했던 종글뢰르와 결이 달랐다. 그들은 ‘창작자’라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으며 심지어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지식인들이었다.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신부나 학자, 또는 수도원을 도망쳐나온 수도사나 학업을 때려치운 학생”이었으며, “일종의 영락계층이자 보헤미안”이었다. 말하자면 대성당 부설학교가 교육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각지에 대학이 태동하던 12세기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주류에 입성하지 못했기에 “교회 및 지배계급에 대해 조금도 존경심이 없으며, 모든 전통과 풍습에 대해 처음부터 반항적인 태도를 취한 일종의 반역자요, 자유사상가”(하우저, 같은 책)였다. 말하자면 당대의 지식인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그들을 ‘골리아드’(Goliard)라고 부른다. 이 단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골리아드를 구성원으로 하는 종단의 창시자 ‘골리아스’에서 왔다는 풍설도 있지만, 그 인물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약성서에서 다윗이 물맷돌을 날려 물리쳤다는 ‘골리앗’에서 왔다거나, 골리아드가 술이나 음식을 워낙 게걸스레 먹었기에 식도(食道)를 뜻하는 단어 ‘굴라’(gula)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다 떠도는 얘기일 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골리아드’라는 명칭이 지닌 함의가 ‘악마의 추종자’ 혹은 ‘개망나니’였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들은 당대의 주류에서 보기에 ‘내놓은 자식들’이었다. 주디스 코핀과 로버트 스테이시가 공저한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박상익 옮김, 소나무)는 그들을 “기도문을 풍자적으로 개작하고 복음서를 희화화한 시끄러운 시인들”이라고 표현한다. 말하자면 교회의 반역자, 사회의 부랑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골리아드의 반체제적 지향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들은 타락한 교회를 향해 독설을 내뱉었으며 술과 도박을 찬양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금욕주의에 대한 최초의 분명한 거부”(<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그들이 창작한 노래는 조야했으나 인간적인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당대의 골리아드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대폿집에서 죽고 싶다/ 술들이 죽어가는 자의 입 가까이 있는 그곳에서/ 후에 천사의 합창대가 내려와 노래하리라/ 이 착한 술꾼에게 신이여 자비를 베푸시기를!”(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에서 인용). 배덕(背德)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남녀의 성관계를 찬양하는 노래들도 적잖이 남겼으니 그것은 때때로 외설에 이르렀다. 여성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찬미하거나 폄훼했다. 골리아드는 대부분 이름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들의 노래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이렇듯이 교회와 귀족을 싸잡아 공격했던 그들은 당대의 ‘반체제 싱어송라이터’였다. 하지만 혁명가였던 것은 아니다. ‘경건한 분들’을 격노하게 했던 그들은 냉소적인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다. 게다가 골리아드 가운데 어떤 이들은 스스로 비난하고 야유했던 ‘안락한 삶’을 오히려 선택하기도 했다.
■골리아드의 노래 <카르미나 부라나>
영화 <엑스칼리버>에는 웅장한 칸타타가 배경음악으로 등장한다. 아서왕의 기사들이 성을 빠져나와 벚꽃이 흐드러진 숲길을 질주하는 장면에서다. 안개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에서도 말발굽소리, 창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음악이 뒤섞인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음악이다. <엑스칼리버> 외에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사용됐으며, 심지어 TV드라마와 CF에도 등장해 그야말로 대중적인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25곡으로 이뤄진 전곡(全曲)을 다 들어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로 익숙해진 선율은 첫번째 곡 ‘O Fortuna’인데, 한국어로 옮기자면 ‘오 운명이여’라고 할 수 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여성형인 까닭에 ‘운명의 여신’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냥 ‘운명’으로만 옮기는 것이 더 적확하겠다.
“오 운명이여, 마치 달처럼 변하는구나/ 언제나 차올랐다 이지러지는구나, 이 지긋지긋한 삶은/ 내키는 대로 처음에는 억눌렀다가 다음에는 달래주네/ 가난도 권력도 얼음처럼 녹여버리네/ 잔인하고 허무한 숙명이여, 너 돌아가는 수레바퀴여/ 고약한 상황이여 건강도 헛일이네, 언제나 어둡고/ 모호하게 사라진다네, 너도 날 괴롭히는구나/ 이제 놀이로써 내 벗은 등짝을, 네 악행에 내어주노라/ 숙명은 지금 건강과 덕성을, 내게 주지 않으니/ 언제나 나는 노예 신세로 시들어간다네/ 그러니 이 시간에 지체 없이, 떨리는 현(弦)을 뜯어라/ 운명은 강한 이도 쓰러뜨리나니, 모두가 나와 함께 울지어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2017년 대규모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를 공연했을 때의 프로그램북(황진규 옮김)에서 인용했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짐작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골리아드의 노래다. 인용한 시는 밤하늘의 달이 차올랐다 이지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골리아드는 대부분 ‘무명’이었고 자신의 작품을 기록하지 않았기에 선율은 물론이거니와 가사도 남은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골리아드의 노래를 필사했던 수사들이 있었다.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베네딕트보이에른(Benediktbeuern) 수도원에서 1803년 발견됐다. ‘카르미나’는 노래를 뜻하는 라틴어 ‘carmen’의 복수형이고 ‘부라나’는 보이에른의 라틴식 표기다. ‘카르미나 부라나’는 ‘보이에른의 노래들’ 혹은 ‘보이에른의 시가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약간 의문이 생긴다. 수사들은 왜 반항적이고 이교도적인, 심지어 상스럽기까지 했던 골리아드의 노래를 필사했던 것일까.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수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필사’라는 행위 자체였다. ‘무엇을 필사하느냐’는 별로 관심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또 유추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어떤’ 수사들은 내심으로 교회에 반항했을 것이다. 비록 수도원에 몸담고 있었으나 내면적으로는 골리아드에게 공감했을 것이다.
<카르미나 부라나> 필사본은 현재 뮌헨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847년에 300여편으로 이뤄진 전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1936년에는 독일의 작곡가 카를 오르프(1895~1982)가 이 가운데 24편을 발췌해 25곡(첫 곡과 마지막 곡은 같은 텍스트)의 장대한 칸타타를 작곡했다. 타악기를 대폭 보강한 엄청난 관현악 편성에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독창을 앞세우고 대합창, 소합창, 어린이 합창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규모의 음악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듣는 ‘보이에른의 노래들’ 가운데 일부다. 물론 골리아드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로 노래한 적이 결코 없었다. 기껏해야 한두 개 악기를 사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루이저 린저(1911~2002)의 전남편이자 훗날 나치에 협력하기도 했던 20세기의 작곡가 오르프는 엄청난 규모로 극장을 뒤흔들었다. <카르미나 부라나>는 1938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극장에서 초연됐다. 그리하여 골리아드의 노래는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로 왔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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