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눈먼 노신사와 여행에서 인생을 배우다
'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면, 그건 보르헤스의 수치가 아니라 노벨상의 수치다.'
보르헤스 단편 '죽음과 나침반' '바벨의 도서관'은 한국 고교 모의고사 지문으로 여러 번 등장했지만 사실 그의 영향력은 세계 문학사 전체를 움켜쥘 정도로 막강했다. 유전병으로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는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며 '어둠 속에서 입으로 소설을 지은' 대문호였다. 동명 소설 원작의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눈먼 도서관장 호르헤 수도사의 실존 모델이 바로 보르헤스였다.
신간 '보르헤스와 나'는 미국의 영문과 교수인 저자가 대학원생 시절 우연히 만난 보르헤스와의 일주일 여행담을 소설 형식으로 쓴 책이다.
오래전, 저자는 도망치듯 스코틀랜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다 보르헤스 작품을 번역 중이던 한 지인에게서 '친척 병환으로 자리를 비워야 하니 보르헤스를 안내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문학에 '초짜'였지만 보르헤스란 이름만은 익숙했다. 저자에게 보르헤스의 첫 모습은 이랬다. "마치 신이 찾아와 옆방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시 71세였던 소설가와의 여정은 '아름다움'과 '자기 고백'에 대한 여정을 이룬다. 젊은 대학원생은 앞이 보이지 않는 노신사에게 미학적 풍경을 묘사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보르헤스는 그럴 때마다 말한다. "어둡다는 건 세부적이지가 못해. 비유를, 이미지를 찾아내게. 나 또한 공포를 느끼지. 감정을 언어에 연결하게. 이미지를 순수하게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공포를 느껴."
보르헤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무한하며, 그러므로 미로의 끝은 언제나 미로의 시작이라는 기묘한 세계관을 가진 소유자였다. 그는 또 말한다. "우리는 이제 미로의 끝에 도달했다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 모든 좋은 이야기들과도 같지. 종말이 없는 것 말일세."
두 사람의 여정은 삶이란 어떤 여정인가라는 대화로 수렴된다.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저자에게 이제는 세상을 떠난 보르헤스는 이렇게 충고했다. "콘피테 티미메트." 라틴어로 쓴 이 말의 의미는 이런 뜻이었다. "너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책의 분위기는, 거장과 제자가 나누는 오페라톤의 과잉된 톤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이었다면 백반집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이 툭툭 던지는 말에서 삶의 큰 깨달음을 얻는 모습에 가깝다. 폭우가 내려 '지금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다'라는 저자의 투정에 "그게 지금 눈먼 사람 앞에서 할 말인가?"라고 보르헤스가 농담하는 부분도 웃지 못할 유머다.
두 사람의 여정을 다 읽고 나면 "시간은 늘 지금밖에 없어. 행동하게, 젊은이! 미루지 말게! 그건 최악의 중죄야"라는 보르헤스의 말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노벨상 수상작가 이언 매큐언은 이 책을 두고 "보석 같은 책"이라고 칭송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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