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8화) [연재소설]

에린 2022. 1. 2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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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금요일까지요?”

김선형은 판매실적 자료를 뽑을 생각에 입술을 씰룩거렸다.

채 상무가 얼마 전 출시한 아이섀도의 판매 현황을 보고하라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세라는 사은품이나 세일 행사로 고객의 반응은 좋았지만, 세일이 끝나면 판매량이 감소할 수도 있어서 속단하기는 일렀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채 상무가 임원회의 때 정식보고를 한다고 하니 실적이 괜찮게 나온 것 같아 한숨 돌렸다.

점심을 먹고 온 사이 책상 위에 리본을 단 청첩장 하나가 곱게 놓여 있었다. 영업부 송 과장의 청첩장이었다.

“시끌벅적하게 연애하더니 드디어 결혼하네.”

“팀장님 가실 거예요?”

김선형이 청첩장을 찬찬히 훑어보며 물었다.

“이번 주 토요일이라….”

세라는 다이어리를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좀 그렇지 않아요? 청첩장은 영업팀만 돌려도 될 텐데 굳이 기획팀까지 돌린데요?”

“또 꼰다.”

“그렇잖아요. 벌써 그쪽 부서는 세 번째인데…. 우리는 한 명도 없잖아요.”

김선형이 세라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토요일 결혼식인데 지금 청첩장을 주는 거 보면,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돌린 거 같은데요. 뭐, 안 와도 그만이라는 뜻 아니겠어요?”

핸드폰을 보던 오수아가 끼어들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오수아의 말에 김선형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의자를 오수아 쪽으로 끌고 갔다.

“뭔데?”

“남자가 두 살 연하인데, 송 과장님이 연상인 걸 모른대요.”

“그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요? 연애할 때 민증 까는 것도 아니고, 송 과장님이 워낙 미모에 신경 써서 동안이잖아요.”

“피부과에 가면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 둘 중 하나는 남자라니까. 더군다나 결혼할 사람이 모델 에이전시에 있다면서. 여자가 남자보다 늙어 보이면 좀 그렇지.”

“어머, 뭐가 그래요? 여자들이 누구 때문에 늙는데?”

김선형의 말을 듣고 오수아가 흥분해서 되받아쳤다.

“수아 씨, 왜 나한테 화를 내? 난 그냥 일반론을 얘기한 거라고.”


김선형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세라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뜨끔했다. 늙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른다. 엄마가 늘 복용하는 혈압약과 관절약 정도가 세라가 아는 전부였다.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파고든 주름과 군데군데 검버섯이 올라와 있는 메마른 손등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늙는다는 건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않은, 피하고 싶은 미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세라는 아랫배가 묵직해지면서 통증을 느꼈다. 진통제 한 알을 먹고 복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책상 달력을 펼쳐 지난달을 들춰가며 날짜를 셌다. 삼 개월째 생리가 없었다. 원래 주기가 불규칙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번엔 꺼림칙했다. 문득 조기폐경이 올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생리량이 많을 때는 폐경이 되는 순간이 ‘여성 해방의 날’이라고 친구들과 웃어넘겼었다. 이제는 그런 기억이 처연하게 다가왔다.

토요일이라 오전 진료만 있다는 말에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동네 병원이 좋은 건 예약하지 않아도 당일 진료가 가능하다는 거였다. 부인과는 다른 진료과보다 환자가 적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라는 의사가 여자라는 말에 부담을 덜었다. 불규칙한 생리 때문에 부인과를 찾은 적이 있지만, 하의를 탈의하고 거치대에 발목을 걸친 채 다리를 벌린 자세는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았다. 초음파와 채혈을 끝내고 검사실을 나왔다.

수납창구로 가다가 깜짝 놀라 등을 돌렸다. 사복 차림이라 한 번에 못 알아봤지만, 분명히 정 박사였다. 그가 지나쳐 갈 때까지 세라는 고개를 숙이고 딴짓을 했다.

“저기요.”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정 박사가 안경 너머로 그녀를 주시하며 알은체를 했다.

“아, 저기, 유, 유….”

정 박사는 자기 머리를 톡톡 치며 생각해 내려 애썼다.

“안녕하세요. 유세라예요.”

“유세라 씨!”

세라는 정 박사가 지나가 주기만 기다렸다.

“혹시, 지금 시간 있어요?”

정 박사를 따라간 곳은 긴 복도 끝에 있는 원장실이었다.

“다시 오라니까 왜 안 왔어요.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정 박사는 세라를 빤히 쳐다봤다. 세라는 정 박사가 불편하면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고맙기도 했다.

“생각하신 대로예요.”

“아… 그랬군요.”

정 박사는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실은 제가 LA에 있을 때 베르너증후군 환자를 맡은 적 있었어요.”

세라는 시선을 떨구고 가방끈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의심이 갔던 겁니다. 지금 좀 어때요. 다른 증상은 없어요?”

정 박사는 무슨 말을 하려다 세라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 휴지를 찾았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정 박사의 말끝에 세라가 힘겹게 잡고 있던 눈물샘이 열렸다. 세라는 정 박사의 말에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외딴섬에 갇혀서 누군가 꺼내주길 기다리고 있던 자신에게 정 박사가 손을 내민 것 같았다. 외로웠던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고, 그 손을 잡고 싶었다.

정 박사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진료 시간이 지나더라도 연락하라며 명함에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세라는 예전에 진료했던 그 환자는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부인과에서 검사 결과를 듣고 막 병원을 나설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세라는 화면에 뜬 강호의 이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호가 잠에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뭐하니?”

“토요일인데 할 일이 없네. 거지 같아.”

세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날씨도 좋은 데 갈 때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아, 짜증 나.”

세라는 하늘을 쳐다보며 바닥에 발끝을 비벼댔다.

“뭐야. 뭐 외롭고 그런 거야? 세라 네가?”

“…….”

오토바이 한 대가 세라 옆을 바짝 지나갔다.

“밖이야?”

“응. 잠깐 나왔어.”

한 손에 든 검사 결과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세라는 눈물이 핑 돌았다.

“…….”

“너, 울어?”

“아씨, 정말….”

강호는 당황했다. 세라를 오랫동안 봐왔지만, 울먹이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요동쳤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전화로는 속속들이 말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침대에서 나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바지에 다리 한쪽을 넣으며 물었다.

“지금 어디야?”

“몰라, 짜증 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세라는 손에 든 검사 결과지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하였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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