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도망쳐도 그대로.. '장미의 이름은 장미'

고희진 기자 2022. 1. 2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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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문학동네|256쪽|1만5000

작가 은희경이 일곱번째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발표했다. 책에는 제29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한 표제작을 포함해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 총 4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렸다. 문학동네 제공


낯선 곳으로의 여행처럼, 특별한 소설을 접하는 것은 독자에게 미지의 감각을 일깨운다. 관계의 복잡성과 그 안에서 개인이 겪는 내밀한 혼란을 섬세하게 채집하는 작가 은희경이 소설집을 냈다. 장편소설 <빛의 과거>(2019)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다. 네 편의 중단편이 실렸는데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했다. 주인공들이 여행지에서 이방인이 되어 돌아보는 삶의 아이러니를 독자는 소설로 엿볼 수 있다.

표제작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주인공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홀로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떠나온 마흔여섯의 여성 수진이다. 어학원에서 만난 세네갈 출신 대학생 마마두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마마두는 수업 시간에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않지만, 수진과는 학급의 짝이 되면서 조금은 개인적인 얘기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의 교류가 어떤 의미일지 독자도 궁금해지는 사이, 마마두와 처음 학교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하기로 한 수진은 그날따라 어리숙해 보이는 마마두에게서 낯선 거리감을 느낀다. 몇몇 사소한 사건들이 반복되며 두 사람은 멀어진다.

수진은 한국에서 뉴욕으로 오기 전 이혼을 했다. 어학연수는 그에게 도피성 여행이었다. 수진은 뉴욕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잘못된 장소로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해도 되돌아 나가서 다른 경로를 찾기에는 두려운 나이”에 처한 스스로를 발견한다.

7년 후, 한국에 돌아온 수진은 당시의 뉴욕을 떠올리며 “마마두와의 작별은 더욱이 기억에 없다”고 회고한다. 무심한 회상이지만, 수진이 왠지 그 이별을 태연하게 넘기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여행자는 낯선 곳에서 미지의 나를 발견하지만, 여행은 언젠가 마무리되고 일상은 지속된다. 이 작품은 “ ‘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인간관계를 둘러싼 근원적 문제를 작가 특유의 개성적이며 상큼한 어법으로 형상화했다”는 평과 함께 제29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표제작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에서도 뉴욕은 일종의 도피처처럼 여겨지는데,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의 승아도 마찬가지다. 충동적으로 뉴욕에 사는 친구 민영을 찾아왔지만, 인스타그램으로 봤던 민영의 뉴욕 삶과는 조금 다른, 낡고 오래된 아파트의 모습에서 그녀는 조금 실망한다. 오랜 친구이지만, 민영에게 “다음주면 계약 기간 2년을 채우게 되고 정규직으로는 채용되지 않을 테니 쫓겨날 게 뻔”하다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민영 역시 본인의 결핍을 굳이 승아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에서 현주는 길고 짧게 네 번이나 뉴욕에 방문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이방인이다. 현주의 연인처럼 보이는 로언은 처음 그에게 친절하고 스스럼없이 굴었지만, 네 번째 방문에도 여전히 영어는 관광객 수준에 머물러 있고 뉴욕에 대해 익숙해지지 않은 것 같은 현주에게 조금 불만인 듯 보인다. 사실 글을 쓰는 현주는 뉴욕에서 새로운 극작품을 마무리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오면 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글은 써지지 않고 로언과의 관계도 점차 나빠질 뿐이다. 80대 어머니와 함께 문학 행사의 일환으로 뉴욕을 찾은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주인공도 어머니와 함께해야 할 닷새간의 일정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네 편의 작품들에서 공간보다 낯선 것은 어쩌면 주인공들이 관계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탈피하고 해결책을 찾고 싶어 충동적으로 뉴욕을 찾는다. 그 기간이 짧건 길건 뉴욕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대한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 또한 어느 순간 낯설어진다.

관계가 파국으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인물들이 모두 날카롭게 자신에게 스며드는 감정을 느껴내지만, 이를 과도하게 분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지의 낯선 공간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되돌아보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시간을 견뎌내는 듯하다.

한정된 배경을 중심으로 풀어나간 소설이어서인지, 네 소설 속 인물들이 알게 모르게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소설을 연이어 읽으면서 인물들의 관계가 이어지는 장면을 포착하는 것도 일종의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배경이 뉴욕이지만, 이국의 감성이 많이 묻어나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네 편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뉴욕 브루클린 남쪽 해안의 대표 유원지 ‘코니아일랜드’는 왠지 모르게 두근대는 감정을 유발한다. 아쉽게도 등장인물들 모두 이곳에 가지는 않는다. 어쩌면 코니아일랜드가 한국에서 뉴욕으로 떠난 이들의 또 다른 환상 속 장소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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