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페미니즘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남성 7명의 고백 그리고 선언 [화제의 책]

오경민 기자 입력 2022. 1. 21. 11:25 수정 2022. 1. 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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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페미니스트가 된 남자들

전인수 엮음 | 멜랑콜리아 | 360쪽 | 1만6000원


각종 설문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청년 남성들은 건국 이래 남성들 중 가장 성평등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전통적 성역할을 거부하고, 여성폭력의 심각성에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떤 세대보다 강하게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안티페미니즘은 대세다. 여기에 대선 후보까지 ‘여성가족부 폐지’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안티페미 광풍에 올라타기를 시도한다. 오늘날 여성은 물론, 남성 사이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됐다. 이런 가운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남성들이 있다.

매거진 ‘멜랑콜리아’를 출간한 편집자 전인수가 7명의 남성 페미니스트를 인터뷰해 <페미니스트가 된 남자들>을 펴냈다. 대학생 이준형씨는 “학내에서 성평등 교육을 접하거나 여성학 수업을 듣고 내가 이 구조의 ‘피해자’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생각했다”며 “이런 구조에서 20년 넘도록 피해의 경험이 없다면 당연히 수혜를 받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작가인 서한영교씨는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고 스스로가 가해자였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외모 품평하고, 야한 농담 하고, 유머를 가장한 성희롱을 저지르면서 강간 문화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에 섬뜩함을 느꼈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 문화를 묵인하고 동조하고 지지하고 연루된 실제 가해자였다는 걸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젠더 연구자인 곽승훈씨는 “페미니즘이야말로 휴머니즘을 가장 섬세하고 급진적으로 확장하는 개념이다. 백인-남성-어른이라는 협소하고 한정된 존재만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휴머니즘을 비백인-여성-아이 등으로 확장하는 이상적인 휴머니티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행복한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기자인 박정훈씨는 “남성의 삶에 페미니즘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민주주의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를 묻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며 “이제는 (페미니즘이) ‘남성에게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넘어서서,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윤리이자 상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태어났는데 부당하게 차별받거나 폭력을 당하면 안 된다고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는가”라고 했다.

책을 펼치기 전,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인터뷰이들에게 너무 많은 발언권을 주는 것은 아닌가 우려했다. 그러나 인터뷰이들은 성차별의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을 존중하면서도 남성 스스로 말할 자리를 찾는 문제에 세심하고 겸허하게 접근했다. 곽승훈씨는 “남성이 전면에서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앗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발화 권력을 쥐게 되기 때문에 주저하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저는 저를 페미니스트로 선언하고 그렇게 행동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당사자가 아니니까 뒤에 물러서서 응원하고 지지만 하면 어느 순간 ‘이건 내 일이 아니니까’ ‘맞장구만 치면 되지’ 같은 식으로 너무 소극적이고 무책임하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체를 운영하는 이한씨는 “권력은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다. 남성으로서의 위치성이나 권력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소통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출발하되, 나중에는 그것들이 방해가 되지 않게 꺼내놓고 나눠야 한다”고 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와 싸우고 거듭날 논의의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남성 페미니스트에게도 연대할 사람들, ‘곁’이 필요하다. 인터뷰이들의 직업만 봐도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인터뷰이들은 젠더·여성학 연구자, 기자, 작가, 정당인,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다. 페미니즘 가치에 동의하는 이들이 그 주변에 많을 수밖에 없다. 이들과 같은 환경에 놓여 있지 않은 ‘평범한’ 남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차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지난해 12월15일 생을 마감한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는 “한 사람의 남성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가부장적 경계를 용감하게 넘을 때 여성과 남성, 그리고 아이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변한다”고 썼다. 안티페미니즘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 더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어떻게 탄생시킬 것인가는 중요한 과제다. 성차별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남성, 정체성 정치에 갇힌 여성 페미니스트까지 모두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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