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산책] 추상회화로의 초대..'화단의 혁명가' 말레비치·칸딘스키를 만나다

최동현 2022. 1. 2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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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말레비치&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 말레비치&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전시장에 걸린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1915).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이건 도대체 뭘 그린 걸까….’ 미술관에서 종종 무엇을 그렸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대체로 추상회화가 그렇다. 마치 수학 시간에 칠판을 보는 것처럼 점·선·면의 기하학적 무늬와 도형들로만 채워진 경우엔 머리가 지끈해진다.

난해함은 그림 자체라기보다는 대체로 인간의 인식체계에서 비롯된다. 해당 작품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형상화한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기억을 더듬어 그 대상이 무엇인지 유추하려는 데서 두통은 찾아온다. 애초에 그림 속 도상은 작가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인간은 왜 이렇게 사고하게 된 걸까. 어쩌면 서구식 회화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 고대 동굴벽화부터 20세기 초반 서양화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사람·동물·사물 등 자연에 실재하는 대상을 화폭에 담아왔다. 객관적 대상을 재현하는 게 회화의 의무였다. 그러니 그림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대상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유 과정일 것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그런데 20세기 초 혁명의 분위가 감돌던 러시아에서 이런 회화의 관습을 최초로 무너뜨린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예술사조는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데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실재하는 물적 대상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점·선·면·색감·질감 등으로 개인의 주관적 관념을 표현하는 추상회화를 처음 시도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현재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명은 ‘칸딘스키, 말레비치&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으로 약 100년 전 러시아를 뒤흔든 작가 49인의 작품 75점을 소개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최초의 완전한 추상화로 평가받는다. 중앙부엔 두껍게 칠한 물감의 자연스러운 균열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가 말레비치다. 그의 대표작은 ‘검은 사각형’(1915·사진)이다. 하얀 캔버스 한가운데 가로와 세로 길이가 각각 79.5㎝인 검정색 정사각형 하나를 그린 게 전부다. 이 작품은 러시아 트리치아코프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아직 경매시장에 나온 적은 없으나 가치가 1조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검은 사각형’이 천문학적 액수로 평가받는 이유는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최초의 완전한 추상화라서다. 말레비치는 회화가 자연을 재현하는 수단이기를 거부하며 가장 단순한 구성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를 ‘절대주의(Suprematism)’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전의 회화 양식들은 냉정히 말해 모두 시각적 리얼리티의 모방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본질적으로 원시인의 동굴벽화에서 나아진 것이 없다. 인식 가능한 사물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인간 정신의 표현인 절대주의만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진정한 미술이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칸딘스키, 말레비치&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전시장의 모습.

혹자는 말레비치가 그림을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라 탓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미술의 경계를 허물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 예술가 그 자체였다. 그림을 향유의 대상이 아닌 아닌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끌어올린 것도 말레비치다. 누군가는 ‘검은 사각형’을 보고 우주의 탄생을 얘기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노자의 ‘무위자연’에 빗대기도 한다. 각자의 주관에 따라 저마다의 해석이 가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싹을 틔운 장본인이 말레비치다.

이번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장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초기작 중 하나인 ‘절대주의’(1915)를 비롯해 그의 입체 미래주의 작품인 ‘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1913)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말레비치와 칸딘스키를 필두로 미하일 라리오노프(1881~1964), 나탈리아 곤차로바(1881~1962), 알렉산드르 로드첸코(1891~1956) 등 20세기 현대미술·건축·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들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오는 4월17일까지.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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