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저녁엔 벽소명월 아침엔 천왕일출..지리산, 뭘 더 바라시나요

신용석 기자 2022. 1. 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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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리산 화대종주 ②
아늑한 세석평전, 그림같은 연하선경..통천문 지나니 곧 정상
천왕봉의 겨울. 혹한의 추위에 아랑곳 않고 천왕봉의 설경을 즐기는 탐방객들. 사진 조점선. © 뉴스1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연하천-벽소령-세석평전 9.9㎞ "벽소령 운해 넘어, 이상향 세석평전으로"

연하천에서 삼각고지까지 소풍길 같은 길을 지나, 몇군데 돌길을 내려서면 길쭉하고 두꺼운 두개의 바위덩어리 형제봉(1452m)이 나타난다. 바위 아래서 오가는 사람들이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다. 이어서 좀 지루하다 싶은 숲속 돌밭길을 지나 벽소령 대피소(1340m)에 도착한다. 여기는 경상도답게 레인저들의 인상은 다정하나 말투는 투박해서 탐방객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한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억센 억양이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중년의 레인저에게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얘기는 하느냐? 했더니, 연애할 때 딱 한번 했다고 한다.

지리산 십경 중 하나가 벽소명월(碧霄明月)이다. '옥돌처럼 짙푸른 하늘에 비치는 푸르스름한 달빛'이라는데, 나는 그런 벽소령의 달을 본 기억이 없다. 도대체 몇백번을 와야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어느 겨울날 대피소 레인저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왔다. '벽소령의 푸른 밤'이었다.

벽소령대피소에 함박눈이 내리는 밤, 푸르스름한 기운(벽소/碧霄)이 서리는 신비한 풍경이다. © 뉴스1

벽소령대피소는 지리산 밑에서 가장 가까운 대피소다. 남쪽으로 하동의 삼정마을, 북쪽으로 함양의 음정마을이 2~3시간 거리에 있다. 종주 중간에 체력이 소진됐거나 관절이 불편해서 더 진행이 어려운 사람은 여기서 하산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지리산종주는 다시 시도할 수 있지만, 무리해서 가다가 큰 부상을 당하면 다시 시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산을 많이 다닌 사람도 중간에 계획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벽소령을 출발하며 내려다보니 멀리 섬진강과 백운산 위로 거친 구름바다가 '쓰나미 파도'처럼 넘실넘실한다. 구름이 넘쳐 산과 산의 틈을 메꾸며 구름의 강이 흐르고, 호수를 이룬다.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일시적 장관이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나지막한 덕평봉 오르막을 올라 선비샘(1456m)에 도착한다. 그곳의 낮은 물구멍에서 물을 받으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예의 바른' 선비의 샘이다. 목을 축이고 숲에 덮인 긴 오르막을 30분쯤 오르면, 사방이 탁 트인 1564m 전망터에 이른다. 천왕봉까지의 능선길이 훤하게 뚫린 뷰포인트다. 이어서 짧은 내리막 끝에서 일곱 명의 선녀가 서있는 칠선봉(1558m)에 이른다. 그냥 휙휙 지나가지 말고 이 거칠고 길쭉한 바위들이 선녀로 보이는 풍경 맛을 음미하며 쉬엄쉬엄 가는 게 좋다.

세석대피소에 이르는 마지막 긴 오르막, 한번은 숨을 골라야 하는 기다란 데크계단을 힘겹게 올라서서 조금 가면 영신봉(1651m)이다. 풍수지리에 능하고 도를 닦았던 사람들, 무속인들은 영신봉을 지리산의 정신적 지주로 친다. 그래서 영신(靈神)봉이다.

영신봉 바로 밑, 이제 세석평전(細石平田)이다. 잔돌이 많은, 즉 큰 돌은 없어서 밭농사를 할 수 있다는 곳이다. 촛대봉 아래로 우람하고 탁 트인 고원이 마치 알프스의 초원을 보듯 이색적이다. 세석평전은 지리산의 자연과 역사가 압축된 장소다. "지리산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고 했던 민중과 피난자들, 빨치산들이 물 많고 흙 좋은 여기에서 밭을 일구며 은신했다. 그래서 쫓고 쫓기는 격전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전쟁과 이후의 도벌과 야영으로 황폐해졌던 세석평전을 복구해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다른 곳의 구상나무가 기후변화로 쇠퇴하고 있으나 숲이 축축한 이곳의 구상나무는 푸릇푸릇 쌩쌩하다. 사람에게도 생물에게도 이상향이다.

아름다운 세석평전. 촛대봉 밑으로 30만 평의 넓은 고원에 철쭉과 구상나무가 푸릇하게 자란다. © 뉴스1

◇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 5.1 "반야봉 뷰-트레일, 천왕봉 감격의 일출"

세석대피소에서 휴식과 사색의 시간을 갖고, 20분쯤 오르막 끝에 당도하는 촛대봉(1703m)은 종주능선에서 최고의 전망대다. 여기서 바라보는 일출은 천왕봉 일출 못지않게 장엄하다. 촛대봉에서 남쪽으로 빨치산들이 야전병원을 차렸다는 계곡과 도인들이 숨어 살았다는 청학연못이 있다. 이 지역은 생태계보호를 위한 출입금지구역이다. 촛대봉을 내려서서 얕은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하다 연하봉(1730m)에 이른다. 잘 가꾼 정원처럼 곱게 보이는 이곳을 이원규 시인은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며 찬미했다.

연하봉을 내려서서 곧 당도하는 장터목(1653m)은 '사람들이 모이는' 목(牧)이다. 예전에 남쪽 산청과 북쪽 함양 사람들의 장터였고,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북적대는 대피소가 있는 곳이다. 여기서 반야봉 방향으로 첩첩한 산자락의 실루엣과 불콰한 해넘이 장면은 지리산 10경에 1경을 추가할 만큼 야성미가 있다.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에서 많은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음식을 조리하면, 혀로 느끼는 맛은 각각 다르지만, 모든 냄새가 뒤섞여 코로 맡는 냄새는 다 같다. 대피소 투숙객들의 끙끙대는 신음과 잠꼬대, 이 가는 소리와 코 고는 소음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많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적어도 일출 한 시간 전에는 출발하기 때문에 이래저래 깊은 잠을 자기 어렵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급한 오르막 끝에 고사목으로 유명한 제석봉(1808m)이 있다. 예전에 나무들을 마구 벌목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모든 나무에 불을 지른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이곳이 고사목 지대가 됐다. 그 고사목들도 강풍으로 넘어져 이제는 몇 그루 남지 않았다. 20년 전부터 심은 구상나무가 차츰 키를 높이고 있어 본래 경관으로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곳은 제석봉을 근경으로, 지나온 장쾌한 지리산능선과 운해를 원경으로 사진 찍는 최고의 뷰-트레일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문', 통천문 바위구멍을 통과해 짧은 데크계단과 돌길을 올라서면 이제 드디어 대한민국 육지의 꼭대기 천왕봉(1915m)이다.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사방팔방으로 무등산, 덕유산, 팔공산, 남해바다 등 대한민국의 절반이 보이는 듯하고, 그 너머 지구의 끝까지, 우주의 끝까지 모두가 지리산 영역으로 느껴진다.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덜덜 떨며 기다리던 천왕봉 일출. 검은 산너울의 지평선 끝에 빨간 테두리가 생기며 회색 하늘이 벌겋게 물드는 가운데, 문득 여의주 같은 붉은 햇덩이가 쑤욱 솟아오른다. 쏟아지는 햇살이 검은 이불을 걷어내며 겹겹의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인다. 지리산을 깨우는 것이다. 사람들이 '와~'하는 탄성을 지르고, 그 눈부신 햇덩이와 밝은 햇살에 전율과 감격을 느낀다. 번민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꿈과 결의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천왕봉의 여명. 일출 직전, 사람들이 덜덜 떠는 가운데 저 멀리 산너울에 빨간 테두리가 생기고 있다. © 뉴스1
천왕봉 일출. 불쑥 떠오른 붉은 햇덩이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지리산을 깨우고 있다. 사람들이 탄성을 지른다. © 뉴스1

◇천왕봉-치밭목-대원사 13.7㎞ "책 한권 읽은 것처럼 뿌듯한 종주 성공!"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는 13.7㎞, 버스가 있는 대원사주차장까지는 15.7㎞로 장거리 하산길이다. 체력이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5.4㎞의 중산리로 하산하는 것이 좋다. 천왕봉 바로 옆에 있어 이름을 날릴 수 없는 중봉(1875m)을 내려서면 한 시간 내에 써리봉(1602m)에 도착한다. 여기서 천왕봉을 바라보면, 그동안 바라보았던 뾰족한 모습과 전혀 다른, 두껍고 웅장한 경관이다. 써리봉에서 30분쯤 내려서면 종주길에서 마지막 대피소인 치밭목이다. 이 대피소에서 하룻밤 자면 고향집처럼 편안하고, 따듯한 아침햇빛을 쪼이면 다시 졸리는 그런 아늑한 곳이다. 여기서 30분쯤 내려가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는 무재치기 폭포를 일견한다. 큰 암반에 붙어 넓은 물줄기가 여러 갈래 내려오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여기부터는 한적한 내리막이다. 종점을 앞두어 마음이 급하지만, 다리 힘이 빠져 발목이 접질리거나 무릅이 꺾이는 부상을 당할 염려가 많다. 천천히 쉬엄쉬엄 걷는 것이 종주의 성공 요인이다. 유평마을을 지나, 아름다운 계곡에 붙어 조성된 탐방로를 내려가며 종주를 마무리한다. 대원사에서 택시를 타거나, 다시 2㎞를 내려가 대원사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으로 지리산종주는 완료된다.

지리산 화대종주!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길 46㎞를 걸으며 수많은 풍경과 사람, 그리고 나의 내면을 만났다. 왜 산을 다니는가? 사람마다 답은 다를 것이다. 나는 '전과 다른 나를 찾아서'라고 답한다. 몸은 가벼워졌고, 마음은 가뿐해졌다. "이 산에 들어오면 지혜(智)가 달라진다(異)"는 지리산 종주를 마쳤으니, 마치 좋은 책을 읽은 것처럼, 어제와 다른 내가 돼 돌아가는 것이다.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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