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둘이 하지만, 싸움을 끝내는건 혼자도 가능하다

한겨레 2022. 1. 21.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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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밤에 마을 개들이 닭과 토끼 육십여 마리를 요절냈단다.

두 장로의 상심이 컸겠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아이들이 두 늙은이에게 쓴 편지글을 읽으며 속으로 한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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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사진 픽사베이

#1 두 남자가 나란히 걸으며 무슨 놀이를 한다. 화투 쳐서 이긴 쪽이 진 쪽 옷을 하나씩 벗기는 수상한 놀이 비슷하다.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자기가 지닌 것들 가운데 하나를 넘겨주는 놀이다. 처음에는 킬킬거리며 즐겁더니 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바뀌면서 놀이가 다툼으로 다툼이 싸움으로 변질된다. 동시에 주인공 모습도 바뀐다. 실은 바뀌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두 남자가 아니라 두 마리 사나운 개로 바뀌어 있다. 마침내 두 마리 개가 이빨을 드러내고 마지막 한판을 맞는다.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이긴 쪽이 진 쪽의 마지막 것을 차지하는 판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마지막 남은 것 하나를 둘 중 하나가 차지하는 마지막 놀이가 시작된다. 승부가 났다. 이긴 쪽이 그것을 가져간다. 그런데 가져오고 보니 어? 이 무슨 까닭인가? 그게 다름 아닌 자기 심장이다. 여기로 심장을 가져온 것은 어디에서 심장을 가져온 거다. 심장을 가져오자마자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도 함께 죽고 만다. 이게 무슨 형이상학적 꿈인가? 고래를 갸웃거리다가 꿈에서 나온다. 나와 보니 금방 알겠다, 이쪽과 저쪽이 이름만 다를 뿐, 실은 같은 것임을.

#2 식당에서 웬 젊은 내외하고 마주앉아 밥을 먹는데 저보다 큰 화덕에 생선을 굽다가 생선에서 떨어지는 기름에 불이 옮겨 붙어 절절매는 계집아이를 돕겠다며 식당 안주인이 달려가지만 불길이 너무 세어서 사람이 불에 델 것 같은 장면을 영화 스틸처럼 구경하는데, 문득 접시 바닥에 한문으로 새겨 넣은 짧은 시가 눈에 들어온다. 이무욕(以無慾)으로 위욕(爲慾)이면 시무욕(是無慾)인가 불욕(不慾)인가? 그 다음 구절은 문자들이 지워지고 내용만 남았다. 이런 뜻이다. 옛 사람들은 나무로 불을 때더니 요즘 사람들은 불로 나무를 때는구나. 꿈에서 깨어나 생각한다. …욕심 없기를 욕심낸다면 욕심이 없는 것인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인가? 나무가 불을 때는 것인가? 불이 나무를 때는 것인가? 어지럽다. 생각이나 말로 가서 닿을 데가 아닌 경계를 기웃거려본들 무슨 소용이랴? 무욕이든 불욕이든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불평과 불만으로 아까운 세월을 한 순간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 다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으니 하릴없이 한님께 기도드리는 거다, 지금 저에게 있는 것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내심으로 바라는 일이 벌어지든 그렇지 않은 일이 벌어지든, 모두가 당신의 작품인 것을 실감하여, 만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맞다, 옛글에도 지족불욕(知足不辱)이라, 만족할 줄 알면 욕볼 일이 없다고 했지.

#3 죽변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던 박 권사를 길에서 만난다. 삼십대 중반의 장대한 모습이 추레한 늙은이로 바뀌어있다. 요즘 뭐로 소일하느냐 물으니 손녀가 작은 유치원을 경영하는데 뒤를 봐주고 있단다. “그래요? 간밤에 꿈을 꿨는데…” 그에게 꿈 얘기를 들려준다. 육이오 때 양공주였던 어머니한테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딸로 태어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을 고루고루 맛보며 자란 양금자 장로가 전라도 광양에서 한평생 떡 장사로 벌어 모은 삼십억 재산을 읍내 한 유치원에 기증하는데 조건이 하나 있다. 유치원 자리를 번잡한 읍내에서 산과 강과 바다가 함께 어울려 흐르는 곳으로 옮기라는 거다. 마침 광양 여수 순천이 만나는 지점에 산과 강과 바다가 어울려 아담한 숲을 이룬 곳이 있어 그리로 유치원을 옮기는데 꼬맹이들이 신나서 야단법석이다… 꿈 얘기 도중에 박 권사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문득 하늘에서 환하게 웃는 구름이 세상을 내려다본다. 따라 웃으며 그래, 숲이 답이다, 바다와 산과 강이 어울려 흐르는 숲, 거기에 답이 있다,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꿈에서 나온다. 맞아, 칸트도 소로우도 숲과 산책에서 위대한 사상을 길어내었지. 모세는 호렙 산정에서, 예수는 유다 광야에서, 바울로는 다마스쿠스 가는 길에서, 샤를 푸코는 사하라 사막에서… 아,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가자, 사막으로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숲으로, 인위(人爲)의 위(僞)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인간의 생각과 말로는 가서 닿지 못할 곳으로! 거기에 사람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에서 학부모, 마을주민, 외부참가자들과 함께하는 인생학교에서 마음공부를 이끄는 이현주 목사. 사진 순천사랑어린학교 제공

#4 후배 목사 둘이 시골에 처소를 마련했다기에 가서 보니 방이 둘인데 하나는 치료하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하는 방이다. 치료하는 방에는 두툼한 이불이 깔려있고 한 구석에 어른 허리통만큼 굵은 칡뿌리가 놓여있다. 저걸 둘이서 캐다가 너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단다. 속으로, 죽는 줄 알았지만 죽지는 않았군,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무를 옮기려면 고목 아닌 어린 나무를 골랐어야지, 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살던 할머니가 아들 집으로 가게 되어 비어있는 집에, 다른 여자후배가 이사를 한다. 그녀는 그냥 몸만 옮긴다. 살림살이는 할머니가 쓰던 것 그대로 쓰겠단다. 그래, 그래야지, 그게 옳아, 하늘나라는 겨자씨 같아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거라, 몸만 살짝 들어가 숨죽여 살아야지, 스파이처럼! 어렸을 적 스파이 되는 게 꿈이었다던 효선이 생각나서 웃다가 꿈을 벗는다. 싱겁다. 하지만 뭔가 흐느낌 같은 속삭임이 있다. 은(隱)과 밀(密), 두 씨알이 그 흐느낌 속에 숨어있는 것 같다. …오, 한님. 비밀한 당신의 뜻만이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이 늙은 티끌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옴.

엊그제 밤에 마을 개들이 닭과 토끼 육십여 마리를 요절냈단다. 두 장로의 상심이 컸겠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아이들이 두 늙은이에게 쓴 편지글을 읽으며 속으로 한님께 감사드린다. 한 친구는 개들도 개들이라서 그랬을 테니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닭들은 그토록 비명횡사했지만 아이들이 이토록 대견하게 자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사건으로 학교 키가 한 뼘쯤 더 자랐으려니.

#5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너른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간단한 멜로디가 유치원 아이 손가락 하나로 치는 피아노에서 통통 튕겨 나온다. 그러더니 어느새 장면이 바뀌어 슬기가 유럽 무슨 콩쿠르에 나가려고 연습하는 스튜디오다. 저쪽에 초록색 웃옷을 걸친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자기 피아노를 치고 있다. 카메라가 슬기의 등을 비스듬히 찍는다. 그래서 얼굴은 보이지 않고 손과 건반만 보인다. 손놀림이 빨라진다. 음악이 고조된다. 그래도 현란한 음률 속에 유치원 아이의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너른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단순한 멜로디는 깔끔하게 살아있다. 피아노 터치가 급속도로 빨라지며 손가락과 건반 사이에 마치 보얀 안개가 서려 흐르는 것 같다.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본인 연습을 중단하고 경탄의 눈으로 슬기를 바라본다. 온 세상이 숨을 멈춘 고요 속에서 음악은 클라이맥스로 치달리고… 그러다가 꿈에서 나오며, 슬기가 누군가에게 하는 귓속말을 듣는다. “방금 피아노를 누가 쳤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나는 아니야.” 완전 깨어나서 생각한다, 아니 생각이 떠오른다. 이 몸을 당신께 드립니다, 라는 기도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본디부터 제 것 아닌 무엇을, 어디에도 있지 않은 누가,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기도를 바꿔야겠다, 모든 것이 오로지 당신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유치한 냇물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왔나봅니다, 한님, 고맙습니다. 그만해라, 모두가 당신이라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고마워한다는 거냐?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처음부터 저지만 저는 아직 당신이 아닙니다, 이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네가 고맙구나. 피차 고마워하자. 아멘!

오후 뒷산 기슭 독서 산책. 길을 가다가 비어있는 벤치마다 앉아서 바이런 케이티를 한 장(章)씩 읽는다. “싸움을 하려면 적어도 두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싸움을 끝내는 건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다.” “삶과 죽음이 같은 것이다. 저마다 제 방식으로 너에게 온다.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이원(二元)의 종언(終焉)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고통의 끝이다.” 옳은 말씀! 사람이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상황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본인의 방식이다. 어떤 사람과도 다투지 않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사람은 물론, 어떤 상황과도 다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바꿔야겠다. 모든 상황이, 그것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간에, 자비와 평화로 가는 길을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이다.

글/관옥 이현주 목사의 ‘정처 없는 나그네의 가난한 산책’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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