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예술가의 핏줄

김태훈 논설위원 2022. 1. 2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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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수근은 평생 가난했다. 아들 성남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겠다며 공고에 입학했다. 고3 때 아버지가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유작전에 걸린 그림들 앞에서 성남은 고백했다. “아버지, 저도 화가가 될래요.” 그 후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국선에 7차례 입상했다. 박성남 화백의 장남 진흥도 화가의 길을 택했고 누나 인숙과 조카 천은규도 화가다. 3대가 화가 집안이다.

▶재작년 별세한 한국화의 거장 서세옥은 한학자 아버지의 지도로 한문 서적에 파묻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라서 부친과 다른 길을 걸었지만 우리 것을 사랑하는 피는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아버지에게 배운 서예에 스승인 김용준의 묵법 화풍을 접목해 평생 화업의 지향으로 삼았다. 서울 성북동 자택에 창덕궁 연경당을 본뜬 한옥도 지었다. 세계적 설치미술가인 장남 서도호의 ‘한옥’은 이런 토양에서 키운 결실이다.

▶부부가 다채로운 사연을 빚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낳기도 한다. 운보 김기창의 아내인 화가 박래현은 언어 장애를 가진 남편의 뜻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독순술과 구화를 익혔다. 자식도 넷 낳아 키우면서도 밤잠 줄여가며 그림을 그렸다. 운보는 그런 아내를 ‘밤 부엉이’라 불렀고 아내를 부엉이로 형상화한 작품도 남겼다. 박래현이 그림에만 몰두했으면 더 큰 작품들을 남겼을 것 같다.

▶대지(大地) 미술가 부부인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1935년 6월 13일로 생일이 같다. 반세기 동안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파리 퐁뇌프 다리, 베를린 제국 의회 건물 등을 천으로 감쌌다. 부부가 함께 작업하기로 약속했던 ‘포장된 개선문’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홀로 작업하던 남편마저 재작년 별세하며 위기를 맞았다. 그걸 크리스토의 조카 블라디미르가 이어받아 지난해 9월 파리 시민 앞에 공개했다.

▶서울 광화문의 복합 문화 예술 공간 아트조선스페이스가 20일 개관 기념 특별전 ‘잊다, 잇다, 있다’를 개막했다. 1989년 타계한 한국 색면 추상의 대가 하인두와 그의 딸인 중견 작가 하태임 부녀전이다. 진중하고 사색적인 아버지의 작품들과 밝고 경쾌한 곡면의 색띠가 화폭에 펼쳐진 딸의 ‘통로’(Un Passage) 연작은 다르면서도 닮았다. 전시장에 가보니 하인두 화백이 타계 1년 전 그린 ‘역동의 빛’이 맨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한 바퀴 돌아 마주 선 마지막 작품도 그가 1954년 그린 ‘자화상’이다. 딸의 작품은 그 중간에 배열돼 있다. 예술가의 시작도 끝도 아버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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