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그리운 골목 풍경
아파트 출입문을 나서 동(棟)과 동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이 자리가 한때는 골목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골목으로 난 창으로는 집 안과 밖의 소리가 넘나들었고, 소임을 다한 하얀 연탄재는 누군가 자신을 치워주길 기다리며 골목을 지킨 때가 있었다. 그곳은 아이들 놀이터였다. 숨바꼭질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고 구슬치기도 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한 지붕 세 가족’(MBC)이나 ‘달동네’(KBS) 같은 1980~1990년대 드라마에서 골목은 당연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상은 거대한 음모도, 과도한 선과 악의 대립도 없었다.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의 투덕거림 속에서 어울려 살아갔다.
어느 날 골목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더 이상 집 안과 밖의 소리는 공간을 넘나들 수 없게 되었다. 옆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소리로 짐작하고 마음으로 이해해 주던 시절은 그렇게 끝나갔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너와 나의 경계는 아파트와 아파트를 따라 나뉘었다. 그리고 집에 대한 물음이 바뀌었다. “너 어느 아파트에 사니?”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바꾼 세상은 놀라웠다. 아파트 이름은 단박에 시세와 연결되며 상대의 경제력을 가늠케 했고 어울릴 부류인지 아닌지를 결정했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 집값인 동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집값을 떨어뜨릴 원인이라면 그게 뭐든 제거할 준비.” ‘엉클’(TV조선)이라는 드라마의 한 대사다. 열두 살 지후네가 이사 오던 날, 아파트 입구에선 한바탕 승강이가 벌어졌다. 이유는 임차 거주자인 지후네가 분양 거주자들의 출입구를 이용했다는 것. 심지어 아파트 엄마 모임인 ‘맘블리’ 회원들은 지후를 본 순간 싫은 내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지후네 가족의 아파트 정착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영광일 것도 없는 상처만 쌓여갔다.
가진 자들의 편견과 이기심을 유쾌하고 지혜롭게 풀어가는 ‘엉클’을 보면서 어린 시절 골목이 그리워졌다. 그때라고 다 좋았을까 싶지만 그래도 좋았던 기억이 따뜻한 오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오늘이 쌓여 조금은 나은 내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아직은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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