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 도스토옙스키 [성기완의 내 인생의 책 ⑤]
[경향신문]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대단히 느리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삼중당 문고로 몇 권 사놓고 제대로 못 읽은 기억도 난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쉽게 도전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일단 분량이 얼마 되지 않거든.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다. 그는 이 짧은 1인칭 소설을 통해 19세기 유럽의 합리주의라는 위압적인 상대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처럼 혈혈단신 맞선다. 이런 일을 한 사람은 그와 니체밖에 없다. 그 기개와 용기가 무시무시하다. 앙드레 지드의 말대로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전체 작품을 푸는 열쇠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 작품으로 예술은 비로소 ‘병리학적 인간학’이 된다. 지금으로 치면 악플이나 달고 살 법한 지하생활자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한 음울한 인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단 한순간의 호흡도 놓치지 않고 당대 유럽의 허위의식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에는 2×2=4라는 수학적 연산에 대한 유명한 비판이 실려 있다.
“2×2는 4식의 수학이 내 마음에 안 드는 이상 자연율이니 수학이니 하는 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물론 나는 이마빼기로 이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만한 힘은 내게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결코 이 벽과 화해하지는 않겠다.”
아, 수학이 제일 싫었다. 더구나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 반지하에서 생활한 나에게 이런 구절은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선언문과도 같았다. 고정관념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논리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 때 이 책만큼 좋은 버팀목을 또 어디 가서 찾으랴.
성기완 시인·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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