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기업에서 일하는 당신에게 [슬기로운 기자생활]

선담은 2022. 1. 2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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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경남 거제 일대의 조선소를 항공 촬영한 모습.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최근 한 조선사의 포괄임금제 도입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정용 선임기자

[슬기로운 기자생활] 선담은 | 산업팀 기자

형들, 안녕? 늘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형들이 올리는 글을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답변을 쓰는 건 처음이네.(호칭은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부를게.) 형들은 회사에 화가 나거나 ‘이건 좀 아닌데?’ 싶은 일이 생겼을 때 블라인드에 글을 쓰지. 기자들한테 그걸 보고 형들 회사를 혼쭐내달라고 ‘언론·매거진 라운지’ 태그를 걸어서 말이야. 일하는 사람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모난 돌 취급하는 케이(K)-기업에 다니는 형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줄 대리인을 찾는 거라고 생각해.

이 글을 쓰는 건, 얼마 전에 배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형이 쓴 글을 보고 연락했다가 ‘읽씹’ 당한 일이 생각나서야. 그 회사는 지난 연말에 취업규칙을 바꿔 과장급 이상 직원들에게 포괄임금제를 도입하기로 했어. ‘공짜 노동’은 늘어나는데 형들의 월급과 복지혜택은 줄어든 거지. 근로기준법에 따라 직원들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있었지만, 실상 부서장들이 반대하는 팀원을 따로 불러내 서명을 강요했다는 게 그 형들의 하소연이었어. 하지만 작업은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제도 변경에 찬성한 직원 비중은 80%가 넘었다지. 누군가 재벌 3세 사장님한테 ‘동의 절차를 다시 밟아달라’고 메일까지 썼는데 끝내 회사에 의해 ‘진압’됐다고도 했어. ‘평화로운 사무실’에서 아무 말 못 하는 형들은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블라인드에서 회사와 회사가 낸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에 분노를 쏟아냈어.

그 와중에 어떤 형은 ‘어차피 퇴사할 생각이었다’며 달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더라. 배 만드는 회사에서 도망치면 다른 탈출구가 있을 거란 생각일 거야. 그런데 이 회사에서 벌어진 일은 같은 시기 반도체랑 스마트폰 만드는 회사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됐어. 조선업과 반도체 모두 슈퍼사이클(장기적인 가격상승 추세)이 어쩌고 하는데, 회사는 형들한테 쓰는 돈이 아깝거든. 작년에 난리가 났던 성과급 논란이 또 벌어지는 것도 피곤하고, 그동안 회사가 꼼수로 형들 급여에서 떼먹은 돈을 제대로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들이 계속 나오는 영향도 커. 그래서 당분간 급여 수준이 높은 대기업에선 비슷한 일이 이어질 거야.

여기서 내가 좀 답답한 건, 나쁜 회사를 혼쭐내달라는 형들이 정작 내가 보낸 쪽지에는 답이 없다는 거야. 사실 이런 일이 부지기수이긴 해서 이젠 ‘마상’이랄 것도 없어. 하지만 형들이 무슨 말을 해야 기자들도 뭘 도와주든 말든 하지 않겠어? 물론 그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냐. 기자한테 괜히 연락했다가 신원이 노출돼 회사에서 무슨 불이익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테니까. 나도 형들이 50~100명짜리 회사에 다니면 이런 얘기까진 안 할 것 같아. 그렇지만 형들 회사에는 수백, 수천명의 직원이 있고 우리도 신원 보장은 확실해.

어쩌면 ‘내가 블라인드에 쓴 글이 다 맞는데, 그대로 기사 써주면 안 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 만드는 형들이 회사 입장만 써준 기사를 비판했던 것처럼 기자들도 형들이 쓴 글만 갖고 기사를 쓰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게다가 형들 회사는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이 ‘주작’(조작)이라고 우기거나 글을 쓴 형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 그만이거든. 블라인드라는 ‘대나무숲’이 형들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순 있어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기자들도 형들의 ‘흥신소’나 ‘자판기’는 아냐. 형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버튼만 눌렀다고 뭐가 손에 쥐어지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야.

회사에 화가 난다면, 결국 선택지는 둘 중 하나야. 투쟁하거나 그게 싫으면 타협하거나. 형들도 회사랑 타협하는 건 싫으니까 우리를 찾는 거 아닐까? 쿨내 풍기며 회사를 떠나겠다고 말하는 형들도 솔직히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되잖아. 그러니 새해에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자. 머리에 빨간 띠 매고 팔뚝 흔들라는 게 아니고, 지금부터 형들이 회사에서 겪는 고민을 같이 얘기해보자고.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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