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르포] 내전의 상처 깊은 돈바스에 또 전쟁의 북소리(종합)

김승욱 2022. 1. 2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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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 포격으로 건물 80% 파괴..사상자 5만·실향민 140만 발생
실향민 "또 전쟁 날까 걱정".."아이들을 위해 싸워야" 목소리도
돈바스 전쟁 당시 반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슬라뱐스크의 병원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 반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도네츠크 주 슬라뱐스크의 병원 건물 모습. 2022. 1. 19 kind3@yna.co.kr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지면서 최전선인 돈바스 지역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주(州)와 루간스크 주를 일컫는 지명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분리주의 반군이 충돌한 '돈바스 전쟁'의 무대이기도 하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분리주의 반군은 이곳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고, 양측을 통틀어 약 1만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실제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가장 먼저 총성이 울릴 곳이기도 하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속속 포착되는 가운데 11시간 동안 야간열차를 타고 19일(현지시간) 지난 전쟁의 격전지인 도네츠크 주의 슬라뱐스크에 도착했다.

키예프에서 슬라뱐스크까지 거리는 약 700㎞로 현재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 돈바스 지역에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은 열차가 유일하다.

2014년 도네츠크 공항이 반군의 수중에 떨어진 이후 국내선 항공편이 끊겼고, 한겨울에는 폭설로 도로 곳곳이 폐쇄돼 장거리 차량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도네츠크행 철도편에는 최신형 열차가 배치됐지만, 반군이 도네츠크 중앙역을 장악한 이후 구소련 시절 제작된 낡은 열차가 배정된다.

객차 내부에는 2평 남짓한 방이 마련돼 있고, 이곳에 좁은 2층 침대 2개가 설치돼 있다. 침대 위 칸에 몸을 누였더니 발이 객실 벽에 닿았다.

비록 낡고 좁은 열차지만, 차창 밖 눈 덮인 풍경은 마치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슬라뱐스크로 향하는 야간열차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도네츠크 주 슬라뱐스크로 향하는 야간열차. 2022. 1. 19 kind3@yna.co.kr

돈바스 전쟁은 바로 이곳 슬라뱐스크에서 발화했다. 도네츠크의 분리주의 반군이 슬라뱐스크 시청을 점령한 2014년 4월 12일이 돈바스 전쟁의 공식적인 개전일이다.

순식간에 슬라뱐스크를 장악한 반군은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한 채 정부군을 향해 포화를 쏟아냈다.

정부군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슬라뱐스크를 탈환할 수 있었다.

당시 반군의 포격으로 슬라뱐스크 외곽의 세미노브카 마을은 전체 건물의 80%가 파괴됐다.

이곳에서 세 아이와 함께 외출한 빅토리아씨를 만났다. 빅토리아씨는 전쟁이 두렵지만 러시아가 침공하면 기꺼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서겠다고 했다.

"일부러 전쟁 소식은 잘 듣지 않으려고 해요.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데 더 마음을 쓰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반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슬라뱐스크의 건물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 반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도네츠크 주 슬라뱐스크의 건물. 2022. 1. 19 kind3@yna.co.kr

전쟁 전 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은 포격에 지붕이 완전히 날아갔다. 외벽 일부만 남은 채 쓰러져가는 옛 병원의 잔해는 전쟁의 무자비함을 일깨웠다.

'슬라뱐스크'(СЛАВЯНСК) 라고 적힌 조형물에는 수십 개의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전쟁 때 파괴된 자동차가 곳곳에 방치돼 있고, 시 박물관에는 반군이 사용하던 견인포가 전시돼 있다. 도시 어느 곳에 지뢰가 묻혀있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방치된 폐건물들은 잔뜩 찌푸린 날씨와 어울려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리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눈에 띄는 사람들은 목도리 따위로 얼굴을 휘감은 채 갈 길을 서둘러 갈 뿐이었다.

곳곳에 배치된 군 헌병대원은 낯선 동양인 기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돈바스 전쟁으로 전사하거나 실종된 1만여 군인 이외에도 약 4만 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으며,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만 약 140만 명의 실향민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침공이 현실이 될 경우 또다시 수많은 사상자와 실향민이 발생할 터다.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은 '슬라뱐스크' 입간판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의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은 '슬라뱐스크' 입간판. 2022. 1. 19 kind3@yna.co.kr

그러나 불행히도 전쟁의 북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에 약 10만 명의 대군을 배치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 북쪽의 벨라루스에도 병력을 전개했다.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남부, 북부에 적대 세력이 포진한 형국이 된 것이다.

러시아 특수부대가 우크라이나에 잠입해 침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는 보도가 나오는가 하면, 우크라이나 주재 러시아 외교관 일부가 철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에 미국은 경제 제재 카드를 빼 들었고, 영국과 캐나다는 무기 공급·특수부대 파견 등 실질적인 지원에 나섰다.

자칫하면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터가 될 수 있는 위기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돈바스 전쟁 당시 반군이 사용하던 견인포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 반군이 사용하던 견인포. 2022. 1. 19 kind3@yna.co.kr

도네츠크 주의 성산(聖山) 수도원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 약 200명이 8년째 머물고 있다.

2014년 돈바스 전쟁 직후에는 약 1천명이 이곳에 수용됐으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800여명이 이곳을 떠났다.

이곳에서 만난 이반 아소보브 씨는 루간스크에 살다가 전쟁 발발 이후 살던 집을 버리고 아내와 자녀만 데리고 슬라뱐스크로 이주했다. 그의 친척은 여전히 반군이 장악한 루간스크에 살고 있다.

전쟁의 아픔을 직접 겪은 아소보브 씨는 전쟁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식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자'는 구호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만용으로 치부했다.

다소 러시아의 체면을 세워주더라도 전쟁만큼은 피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속마음이다.

"8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만 데리고 이주해야 했습니다. 요즘 또 전쟁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이게 얼마나 두렵고 긴장된 상황인지 모를 겁니다. 정말 평화가 이뤄지기만을 바랍니다."

인터뷰에 응하는 돈바스 지역 실향민 (슬라뱐스크[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인터뷰에 응하는 돈바스 지역 실향민 이고르 아소보브. 2022. 1. 19 kind3@yna.co.kr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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