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본보 31년 전 보도 재조명

문승현 기자 2022. 1. 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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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충남 출신 일제 징용자 1천5명 명단 발견' 보도
재일동포·학자 등 노력 끝에 명단 입수..강제징용 3000여 명
"충청도민 순해서 강제징용 가장 많아" 관계자 전언에 공분

1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금 광산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통한이 서린 사도(佐渡)광산을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면서 한일 양국 갈등으로 비화한 가운데 사도광산 한국인 강제징용자 1000여 명의 명단을 발견했다는 대전일보의 31년 전 보도가 재조명받고 있다.

일본 보수·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자국 정부의 움직임에 발맞춰 조선인 강제노역을 부정하는 줄기찬 역사왜곡 시도를 예상이라도 한 듯 당시 대전일보는 "선량한 한국인들을 강제징용해 무차별 노동착취와 살생을 자행한 일본 정부는 아직도 사실(史實)을 부인하려 든다"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대전일보는 1991년 11월 16일자 1면을 할애해 일본 니가타현 사도 섬의 미쓰비시 금광 등으로 강제징용된 충남 출신 1005명의 명단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충남(忠南) 출신 일제(日帝) 징용자 1천5명 명단(名單) 발견' 제하의 기사에서 대전일보는 "2차대전 당시 일제의 병참기지화정책에 따라 일본에 강제징용되었던 한국인 노무자 중 니이가타현에 집중적으로 끌려간 충남 출신 1천5명의 명단이 최근 처음으로 밝혀졌다"며 "이 명단은 1939년 이후 니이가타현 사도가시마(佐渡島)의 미쓰비시(三菱) 금광(金鑛) 및 철공소 등에 징용된 한국인들"이라고 밝혔다.

한국인, 특히 충청인의 통한이 서린 일제강점기 탐욕의 섬 사도광산에서 벌어진 인권 린치의 역사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한 반동적 행태에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맞서 무효화하는 일종의 대항력 사료(史料)라는 점에서 대전일보 보도는 주목된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 발간한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미쓰비시광업㈜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사도섬에 있는 금은광인 사도광산은 1601년 처음 발견됐고 1896년 미쓰비시합자회사가 인수한 후 1989년 채굴을 중단할 때까지 103년간 미쓰비시그룹 소속 광산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군수물자 대량수입을 위한 대금으로 금이 필요했고 금 증산에 들어간 사도광산에서는 위험천만한 작업에 투입해야 할 대체노동력이 절실했다. 사도광산은 1939년 2월부터 조선인 동원을 시작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전일보 보도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강제징용 명단은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재일동포와 양심적인 학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확보됐다. 대전일보는 "장명수(조총련귀국자 문제대책협의회 사무국 대표), 박영기(재일한국민단 니이가타현 지방본부 부단장)씨 등 '강제징용한국인 니이가타현 조사회' 대표들이 발굴작업을 통해 확인한 명단을 가지고 충남지역 연고 수소문에 나섬에 따라 알려지게 됐다"며 "가장 많은 한인(韓人)을 고용했던 미쓰비시금광회사가 끝내 협조를 거부하는 바람에 난항을 겪었으나 다행히도 당시 담배 공급을 맡았던 한 회사를 통해 어렵게 이루어졌다"고 명단 입수 과정을 밝혔다.

강제동원 한국인은 3000여 명에 달했다. 대전일보는 "조사회가 확인한 명단은 미쓰비시금광의 충남인 1천5명을 비롯, 니이가타철공소 1백68명, 해륙(海陸)운송회사 1백94명, 비도조(飛島組)작업소 3백명 등 모두 3천여 명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이어 "선량한 한국인들을 강제징용해 무차별 노동착취와 살생을 자행한 일본 정부는 아직도 사실(史實)을 부인하려 든다. 이 같은 왜곡된 일본의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조사회에 가담, 적극 나서게 되었다"는 장명수·박영기 씨의 결기 어린 발언을 소개했다.

대전일보는 또 "이들은 '니이가타현에 끌려온 한국인 징용자 가운데 충청도 출신이 가장 많은데 그것은 충청도민들이 순하기 때문이었다는 당시 관계자의 말이 있다'고 일제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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