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성폭력 피해자의 담대한 생존 기록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출간

이혜인 기자 2022. 1. 2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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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 사실과 사건을 공개한 후에 겪은 2차 가해를 직접 기록한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가 출간됐다.

출판사 천년의상상은 20일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의 출간 사실을 알렸다. 저자인 김잔디씨(가명)는 자신이 입은 피해 내용, 고소에 이르게 된 과정, 박 시장 죽음 이후에 끊임없이 자행된 2차 가해의 실상, 그로 인한 상처를 극복한 과정 등을 기록했다. 필명인 김잔디는 ‘성폭력특례법상 성범죄 피해자는 절차에 따라 가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저자가 소장에 적기 위해 임의로 선택한 이름이다.

김씨는 책 속에서 서울시장 비서로 일하게 된 경위부터 끔찍한 가해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김씨는 2015년 서울시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서울시 산하기관에서 근무하던 중, 갑자기 서울시장 비서직 면접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2015년부터 전보 발령을 받는 2019년 중반까지 김씨는 박 전 시장의 비서로 일했다. 저자는 박 시장이 사적으로 부적절한 연락을 해오기 시작한 시점이 2017년 상반기였다고 말하며, 2018년 9월 시장 집무실에서 있었던 성추행의 구체적 내용과 4년간 지속된 성적 가해 실태를 밝힌다.

저자는 2020년 7월10일 가해자인 박 전 시장이 자신에게는 한 마디 사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정신적으로 극히 위태로운 심신미약 및 공황 상태가 돼 두 차례나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검색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신분이 노출돼 개명 절차도 밟았다.

책에는 저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겪은 일들이 자세하게 담겼다. 박 전 시장을 고소하기로 결심하고 부모에게 이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부모는 딸이 입게 될 2차 가해를 우려해 말렸다. “네가 참아라”는 말을 했던 어머니는 나중에 딸이 입은 피해의 심각성과 고통을 알고 나서는 “이 엄마는 최초의 2차 가해자였다”라며 통절한 고백을 했다.

박 전 시장의 사망 후 시작된 2차 가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블로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피해자의 본명과 사진이 노출되고, ‘살인녀’, ‘꽃뱀’, ‘기획 미투’를 운운하는 박 전 시장 지지세력에 의한 공격이 집요하게 계속됐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피해호소인’ 발언 등 여당 인사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피해자성을 폄훼하거나 피해자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저자는 피해사실을 더 일찍 알리지 못했던 데는 서울시청 내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환경이 작용했다고 말한다. 책 3부의 ‘서울특별시장실 이야기’에는 저자가 공무원이자 노동자로서 경험한 부당한 노동환경과 처우가 담겼다. ‘심기 보좌’라는 명목으로 박 시장이 밥을 먹을 때 말동무로서 동석을 해야 했던 것, 박 시장 가족의 명절 음식까지 챙겨야 했던 것 등 공적 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불법적인 업무 내용도 알린다.

책이 출간돼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김씨는 출판사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이 책을 통해 한 명의 존엄한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잊혀질 권리’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특별히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있어 ‘잊혀질 권리’는 더욱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잊혀질 권리보다 ‘제대로 기억될 권리가 먼저 회복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기억돼야, 제대로 잊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가해를 이어가는 인사들을 보면서 느낀 소회도 털어놨다. 김씨는 “4년간의 성적 괴롭힘뿐만 아니라 잔인했던 2차 가해도 주로 정치인, 학자, 고위공무원, 시민운동가와 같은 권력자에 의해 자행됐다. 영향력이 큰 그들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지지자들은 부화뇌동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저를 괴롭히는 상황이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러한 2차 가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력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하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저를 괴롭힌다고 해서 그로 인해 제가 더욱 크게 고통받고 위축되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의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저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고 인식하고, 어쩌면 제가 그들보다 더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더 강인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저는 이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난해 3월17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고 박원순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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