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 깨진 흥행기록, 봤다 하면 눈물샘 터지는 장면

양형석 입력 2022. 1. 2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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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정우성의 흔치 않은 정통멜로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양형석 기자]

'깐부 할아버지' 오영수 배우에게 골든글러브 남우조연상을 안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한국 시청자들만 느낄 수 있는 재미 포인트가 있다. 바로 <모래시계>의 백재희와 <신세계>의 이자성, <관상>의 수양대군 등을 통해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배우 이정재의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에서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딸의 생일선물을 위해 인형 뽑기를 하는 무능력한 백수 아버지 성기훈을 연기했다.

이정재와는 절친한 친구이면서 30년 가까운 인연에도 여전히 서로 존대를 하기로 유명한 배우 정우성 역시 '잘생기고 멋진 배우'를 이야기할 때는 결코 빠지지 않는다. <비트>의 이민과 <태양은 없다>의 이도철, <놈놈놈>의 박도원, <감시자들>의 제임스, <강철비>의 엄철우 등을 통해 보여준 카리스마는 오직 정우성만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멋이다. 정우성에게는 단순히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긴 것과는 다른 그만의 '아우라'가 있다.

그런 정우성이 다소 색다른 연기를 선보인 영화가 있으니, 18년 전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대신해주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순정남으로 완벽 변신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다. 지난 2004년 개봉해 전국 25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극장 안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이 영화는 재미교포 이재한 감독의 첫 국내 연출작이기도 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일본 원작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일본으로 역수출돼 30억 엔이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CJ 엔터테인먼트
 
방황하는 청춘 아이콘에서 멜로 장인으로

고등학교까지 자퇴할 정도로 가난한 유년 및 청소년기를 보낸 정우성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업계 종사자에게 캐스팅돼 모델일을 시작했다가 1994년 영화 <구미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물론 <구미호>는 서울관객 17만에 그치며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정우성은 단숨에 영화계와 방송계가 주목하는 신예로 떠올랐고 1995년에는 <아스팔트 사나이>에 캐스팅돼 이병헌의 동생을 연기했다.

정우성은 영화 <본투킬>과 <모텔선인장>, 심은하, 신현준과 함께 출연한 드라마 <1.5> 등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고소영과 재회한 <비트>에 출연하며 서울에서만 35만 관객을 동원했다. <비트>를 통해 단숨에 '방황하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정우성은 1999년 동갑내기 친구 이정재와 함께 출연한 <태양은 없다>에서 전성기가 지난 복서 이도철 역을 맡으며 다시 한 번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김성수 감독의 <무사>와 곽경택 감독의 <똥개> 등이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듯 했던 정우성은 2004년 평소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은 정통멜로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출연했다. '멜로퀸'으로 떠오르던 손예진과의 애절한 멜로연기가 돋보였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전국 250만 관객을 동원했고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라는 대사는 배우 정우성을 대표하는 명대사가 됐다.

2006년 전지현과 함께 했던 <데이지>와 김태희와 함께 출연한 <중천>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했던 정우성은 2008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좋은 놈' 박도원 역을 맡으며 화려한 액션연기를 선보였다. 2010년 <아테나: 전쟁의 여신>, 2011년<빠담빠담>을 통해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했던 정우성은 2013년 550만 관객을 동원한 <감시자들>에서 최종빌런 제임스를 연기하며 또 하나의 히트작을 만들었다.

정우성은 데뷔 초부터 꾸준히 흥행작을 내고 있지만 사실 천 만 영화에는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정우성은 데뷔 후 큰 공백이나 논란 없이 꾸준히 관객들에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부지런한 배우다. 작년 음주운전으로 하차한 배성우 대신 <날아라 개천용>에 투입되며 9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했던 정우성은 올해 자신이 직접 연출과 주연을 맡은 영화 <보호자>와 '절친' 이정재가 연출한 <헌트>로 관객을 찾을 전망이다.  

일본에서 15년 간 한국영화 흥행기록 보유
 
 잘 모르는 사이였던 철수(오른쪽)와 수진은 소주 한 잔에 간단히 연인이 된다.
ⓒ CJ 엔터테인먼트
 
2001년에 방영된 일본의 단막극 <나를 잊어도>가 원작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대중들이 흔히 노인성 치매로 알고 있는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을 27세 여성이 앓는다는 설정의 영화다. 일본 드라마가 원작이지만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후 일본에 역수출돼 30억 엔이 넘는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2020년 <기생충>(47억 엔)이 개봉하기 전까지 일본 내 한국영화 최고흥행기록을 무려 15년 간 유지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최루성 멜로 영화답게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방심한 관객들의 가슴을 덜컥 내려 앉게 만드는 결정적 장면은 아침에 수진이 출근하는 철수를 바라보며 "영민(백종학 분)씨, 사랑해"라고 부르는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얘기를 들은 철수는 애써 미소 지은 후 문 밖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오열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음악은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맡았다. 영화 후반부에 삽입된 부활의 명곡 <아름다운 사실>은 영화의 슬픔을 극대화했다. 김태원은 1993년에 발표된 <사랑할수록>, 2002년에 히트한 <네버 엔딩 스토리>와 함께 <아름다운 사실>을 해체 위기에 놓였던 밴드 부활의 운명을 바꾼 노래로 꼽았다. 빅마마의 이영현이 만들고 거미가 부른 <날 그만 잊어요>도 영화의 엔딩곡으로 쓰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5년에 출시된 <내 머리 속의 지우개> DVD에서는 26분의 추가영상이 들어 있는 런닝타임 2시간24분 짜리 '감독판'을 감상할 수 있다. 수진이 떠난 후 철수가 수진을 백방으로 찾아 다니는 장면들과 철수와 어머니(김부선 분)의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히 소개된다. 볼 거리가 늘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감독판 및 확장판 영화들이 그렇듯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감독판 역시 늘어난 시간만큼 재미와 완성도가 더 올라갔다고 할 수는 없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연출한 이재한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한국계 미국인으로 뉴욕대학교에서 영화학을 전공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후에는 다소 뜬금 없이 201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포화 속으로>를 연출했다. 이재한 감독은 2016년에도 이정재와 이범수, 리암 니슨, 진세연, 정준호 등이 출연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만들어 7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같은 아픔을 가진 의사의 무심한 듯한 공감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수진을 진단한 의사(오른쪽)는 알츠하이머로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종 사건들이 펼쳐지는 드라마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외에도 주변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2시간 안팎의 시간 동안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기 쉽지 않다. 이 때문인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도 철수의 옛날 여자친구나 철수를 남몰래 좋아하는 직장동료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수진에게는 직장상사였던 유부남을 사랑했다는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백종학이 연기한 수진의 옛사랑 서영민이 등장한다. 영민은 수진이 오락가락하는 기억으로 혼란스러울 때 나타나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수진을 더욱 큰 혼란에 빠트린다. 제작부와 프로듀서로 활약하다가 90년대 말부터 연기를 시작한 백종학은 여러 작품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다가 2012년 단편영화 <솔루션>을 끝으로 연기활동을 접었다.

비음이 섞인 개성 있는 목소리로 2000년대 중·후반 예능인과 가수, 배우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현영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수진의 친구로 짧게 출연했다. 물론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출연 당시엔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이기 때문에 그저 대사 몇 마디만 있는 단역이었다.

<공공의 적>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과장, <살인의 추억>에서 의사 역할로 출연했던 권병길 배우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알츠하이머 전문의로 출연했다. 같은 병으로 아내를 잃은 아픔을 가진 역할로 수진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 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는 유쾌한 이미지가 강했던 권병길 배우의 진지한 연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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