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전통의 육전에 현대적 네비올로

한겨레 2022. 1. 20. 11:2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소싯적 양력설과 음력설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전통주의자라면 매콤새콤 부추무침을 일부러 준비하겠지만, 모더니스트는 고급스러운 신맛과 묵직한 타닌의 네비올로면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네비올로 양조에서도 전통과 혁신이 뒤얽혀 공존한다.

네비올로는 전통 방식으로 양조하면 산도와 타닌이 거칠어서 커다란 슬로베니아산 오크통에서 5년 이상 장기숙성하기도 한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ESC : 임승수의 레드]임승수의 레드
전통-혁신 절충한 로베르토 보에르치오 랑게 네비올로
이 와인의 생산자인 로베르토 보에르치오는 원래 혁신파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전통 방식을 배합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절충주의자가 되었다.

소싯적 양력설과 음력설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분명 새해 첫날은 1월1일인데 하루만 쉬고 음력설은 며칠을 쉬니 더욱 그랬다. 먹는 음식도 달라서 연말연시에는 대체로 현대적 음식을 즐기지만 음력설에는 일부러 전통음식을 먹는다. 중국황제(음력설)와 로마황제(양력설)의 영향력이 달력 위에서 충돌하는 건데, 당시에는 전통과 혁신이 뒤얽혀 공존하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렸나 보다.

어쨌거나 음력설도 다가오고 해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겠다는 패기로 모둠전에 와인을 곁들여보았다. 괜찮으면 조상님께 올려볼까 싶기도 하고. 준비한 와인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서 생산된 ‘로베르토 보에르치오 랑게 네비올로’다. 네비올로 품종은 음습한 버섯 내음을 깔고 우아하게 피어오르는 꽃향기, 그리고 특유의 강렬한 타닌이 인상적이다.

설빔처럼 달걀옷을 두른 기름진 육전을 하나 집어서 음복하듯 정성스럽게 씹는다. 소고기와 달걀옷이 만들어내는 각별한 고소함을 한껏 탐닉하다 보면 슬슬 느끼해지는 시점이 온다. 전통주의자라면 매콤새콤 부추무침을 일부러 준비하겠지만, 모더니스트는 고급스러운 신맛과 묵직한 타닌의 네비올로면 충분하다. 마시는 순간, 육전은 세례요한이었으며 네비올로야말로 메시아임을 즉시 깨닫는다. 버섯, 호박 등 다양한 전과 두루두루 어울렸지만 동태전과는 그저 그렇다. 생선만 피하자.

그러고 보니 네비올로 양조에서도 전통과 혁신이 뒤얽혀 공존한다. 네비올로는 전통 방식으로 양조하면 산도와 타닌이 거칠어서 커다란 슬로베니아산 오크통에서 5년 이상 장기숙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몇몇 생산자들이 새로운 양조 방법을 도입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기존의 큰 오크통 대신 프랑스산 소형 오크통을 사용하고 압착, 발효 방식에 변화를 주었는데, 이를 통해 숙성 기간을 극적으로 단축하면서도 전보다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전통주의자들은 새로운 방식이 네비올로의 개성을 망가뜨린다고 여겼다. 이것이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져 와인 업계에서 꽤 뜨거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내가 마신 와인의 생산자인 로베르토 보에르치오는 원래 혁신파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전통 방식을 배합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절충주의자가 되었다. 맛이라는 본질로 파고들다 보면 전통이니 현대니 갈라치는 게 무의미해지나 보다. 문득 한 네비올로 양조자의 얘기가 떠오른다. 타닌이 강한 전통적 네비올로는 기름지고 소스가 강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옛사람들의 식습관이 그러했단다. 하지만 최근에는 부드럽고 섬세한 현대식 네비올로가 각광받는다. 식습관이 변해 심심하고 담백한 음식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렇구나! 옛날에도 옳았고 지금도 옳을 뿐이다. 양력이든 음력이든, 전통이든 혁신이든, 음식은 먹는 순간 맛있으면 그만이니까.

글·사진 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reltih@nate.com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