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심이 민심이라면

한겨레 2022. 1. 1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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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선거철이 오면 중국 친구가 농담조로 건넸던 말을 떠올린다. “난 한국 대통령이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이라고 봐. 총에 맞아 죽고, 사형 선고받고, 뛰어내리고, 감옥 가고…. 그런데도 대통령 되겠다고 기를 쓰고 싸우는 거 보면 신기해.” 국가주석이 선거로 선출되지 않고, 지방 관리는 욕해도 ‘중앙’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는 나라에서 살았으니 지척에서 벌어지는 야단법석이 이상할 법도 하다. 하지만 광장과 선거의 소란을 거쳐 이 나라는 독재를 심판했고, 오월 광주를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돌려놨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광화문 일대를 밝힌 촛불은 중국 유학생들한테도 먹먹한 풍경이었다. 혼란이 없으면 민주도 없다고 당당히 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5년 만에 치러지는 대선에서 자부심은 사라졌다. 거대 양당 후보는 벌거벗고 행진 중인데, 창피한 유권자가 숨을 곳을 찾는다. 두 후보 모두 민의를 따른다지만 자기한테 유리한 국민을 선택하고, 프레임을 씌운다. 국토보유세를 신설하겠다며 강도 높은 분배 정책을 예고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국민들이 반대하면 안 한다”고 돌연 말을 바꿨다. 여권의 잇따른 성범죄를 비난해온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남기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이라 얼버무렸다. 국민을 골라내면서도 말끝마다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국민의 의지가 하나로 존재하는 듯 떠드니 포퓰리즘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특히 2030 남성을 안티페미니스트로 묶고, 여가부·여성계를 응징 대상으로 삼은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국민 내부에 적을 만들어 지지자를 선동하는 가장 천박한 포퓰리즘을 공연 중이다.

사실 거대 양당의 꼴불견은 포퓰리즘의 단면에 불과하다. 대의민주주의가 정당성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비전문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퇴락이라기보다 그 조건이라고 역설한다. 풀뿌리 민중의 저항운동도 포퓰리즘 역사의 일부이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결집하여 인민(people)으로 새로 정의하고, 인민과 엘리트의 구분 자체를 쟁점화하는 투쟁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다. 권위주의의 위험을 우려하면서도 포퓰리즘에서 가능성의 계기를 찾는 이유다.

문제는 선거가 가능성으로서의 포퓰리즘과 대척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자산소득 계층을, 윤석열 후보가 페미니즘 반대 세력을 국민으로 받들 때, 이들이 읽은 민심이란 그저 표심에 불과하다. 후보가 응답할 국민은 정치공학적 계산과 컨설팅을 거친 산물이다. 여기서 새로운 모험으로서의 포퓰리즘을 논할 자리는 없다.

표심이 곧 민심이라면, 표심으로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민심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약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기대에 걸맞은 삶을 살았는지, 몫을 박탈당했거나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과 연대했는지, 이들이 적극적인 유권자 국민으로 후보들을 긴장시킬 수 있게 도왔는지 자문할 시간이다.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이 선거 때 만나자며 지역으로 돌아가 의식화·조직화에 힘쓰던 시절이 있었다. 현재 나는 인터넷 금융 커뮤니티에서 의식화·조직화의 신자유주의 버전을 목격 중이다. 코로나 시기 노동자, 빈민, 소수자들이 공론장 바깥으로 밀려난 대신, 삶의 불안에 잠식된 시민들이 투자자 주체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노동을 저렴하게 전유하고 착취하는 시대에, ‘개미’들은 임금노동을 거부하고, 재테크로 안전망을 짠다. 민중-지식인의 위계 대신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고,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공매도에서 쪼개기 상장까지 ‘불의’에 눈뜨면서 거대 기업의 횡포에 함께 맞서기도 한다. 187만명이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 <삼프로티브이>가 대선 후보 토론 자리를 만들어 “나라를 구했다”니, 조직화를 꿈꾼다면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 이 저항의 최종 목표는 각자 알아서 잘 사는 것이다. 광주 화정아이파크 붕괴 참사 뒤 실종자를 찾는 수색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투자 커뮤니티에서는 에이치디씨(HDC) 주식을 손절할지, 버틸지를 두고 논의가 한창이다. 후보들이 앞다퉈 자본시장 공정성 회복을 외치는 마당이니, 엄혹한 불평등의 시대에 각자도생의 꿈 정도가 ‘민심’ 인증을 획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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