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코로나로 더 아픈 사람들

이왕구 2022. 1. 19. 18: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숙인, 장애인, 이주민  향한 시선 싸늘  
 건강권, 주거권 등 기본권 사각지대 놓여
 취약층 온전한 권리 회복은 공동체 의무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서울 아침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진 17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노숙인을 위한 텐트. 뉴스1

한 해 중 가장 추운 절기인 소한을 막 지나서인지 요즘 서울역 지하에 노숙인들이 부쩍 늘었다. 퇴근길 서울역 지하통로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숙인 수십 명을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깥에서 밀려 들어오는 한기도 걱정이지만, 역 구내에선 거리 두기가 되지 않아 감염이 확산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지난 18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빈곤사회운동단체들이 서울역을 관리하는 서울교통공사를 비판하고 노숙인에 대한 차별시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교통공사가 며칠 전 역사 통로와 엘리베이터에 부착한 게시물이 발단이다. 게시물은 ‘엘리베이터 내ㆍ외부에 대소변을 보는 노숙인을 발견 시 역무실로 신고해 달라’는 내용. 막차가 떠난 이후 심야시간에는 서울역 구내에 노숙인들의 생리현상을 해결할 공중화장실이 한 곳도 없다는 현실은 외면한 채, 공공기관이 노숙인들을 아무 곳에서나 볼일을 보는 이들로 낙인찍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시민들에게 노숙인들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고도 시민단체들은 주장한다. 동의를 하건 아니건 서울교통공사의 책임은 분명하다. 게시물의 목적이 역사 내 위생문제 해결이었다면 게시물에 굳이 ‘노숙인’을 콕 짚어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노숙인을 규칙 위반자로 간주하는 차별 의식이 작동했다는 얘기다.

코로나19 유행이 3년 차로 접어들면서 노숙인, 노인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향한 세간의 시선은 차가워지고 이들의 삶은 더 고달파지고 있다. 지난주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개한 보고서는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가 사회적 취약계층에 미친 부정적 영향, 기본권 훼손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상황에서의 취약계층 인권보장 실태’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노숙인,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노인 등 사회적 취약계층 154명에 대한 심층 면접을 토대로 작성됐다.

하루하루 지내기가 버거운 취약계층의 절절한 호소가 보고서에 담겨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될까 봐 외출도 못 하고 가족들도 못 만나는 노인들은 ‘고려장’을 떠올리고, 법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발달장애인은 병원을 찾았다가 외부인에게 ‘왜 마스크를 쓰지 않느냐’라는 지청구를 듣고 신고당했다. 통역이 없어 백신 접종을 못 한 이주민은 부지기수다. 접촉하는 사람이 적어 코로나 감염 가능성이 높지 않은데도 노숙인들은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급식을 먹으려면 1주일에 한 번씩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분명한 인권 침해다. 코로나 사태가 전례 없는 보건 위기 상황이라 해도 이들 사회적 취약계층은 건강권, 이동권, 정보접근권, 주거권 등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걱정되는 점은 이들의 건강권 훼손이다. 사회적 취약계층은 대체로 만성ㆍ퇴행성 질환을 갖고 있어 병원을 찾을 일이 많지만 코로나 사태는 병원 문턱을 높였다. 특히 지난해 말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공공병원 쥐어짜기로, 대부분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전환된 게 치명타가 됐다. 공공병원이 맡았던 노숙인, 행려자, 의료급여 환자 등은 이제 아파도 갈 곳이 별로 없다. 예컨대 공공의료의 버팀목인 국립중앙의료원이 지난해 12월 말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바뀌면서 이후 전원되거나 퇴원 '당한' 취약계층(의료급여, 차상위계층, 행려환자, 노숙인, 외국인 근로자) 환자만 75명이다. 이제 서울에서 취약계층의 입원이 가능한 병원은 12개 시립병원 중 보라매병원 한 곳뿐이다.

재난은 보편적이지만 피해는 불균등하다는 말은, 이제 재난은 보편적이지만 인권보호는 불평등하다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온전한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일은 방역만큼이나 중요한 우리 공동체의 과제다.

이왕구 논설위원 fab4@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