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나라' 같은 집에서 앨리스처럼 살고 싶어요

한겨레 2022. 1. 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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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③ 탈가정 청소년을 위한 안식처
보호시설 외에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모델 벤치마킹 해볼만
청소년. 게티이미지뱅크.
대선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주거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거와 부동산 정책은 집을 소유하거나 구입할 여력이 되는 계층에 집중돼 있다. 청년 등 세입자와 취약계층을 위한 주거대책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필요한 주거 대책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은 무엇인지 ‘주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5회에 걸쳐 싣는다. 집걱정을 끝내고, 주거권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80여개 단체로 구성된 ‘집걱정끝장 대선주거권네트워크'가 연쇄 기고에 참여했다. ―편집자

거리 청소년들을 위한 ‘집’은 없을까

위기 청소년, 불량 청소년, 비행 청소년, 날라리…. 제 청소년기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제 일상에 무관심했고, 저를 가족 구성원으로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존감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탈가정을 선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주거 형태를 경험했고, 청소년 주거 문제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보호시설, 고시원,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자취, 동거 등 다양한 주거 형태를 경험했습니다.

집에서 나온 후 제 집은 길거리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내 맘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밤이 되면 무섭고 외로웠습니다. 탈가정 청소년에게 밤은 매우 위험합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기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때론 그런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내 자존감은 조금씩 무너져내렸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시간도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새벽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살아야겠다” 생각이 불현듯 스쳤고, 곧장 보호시설을 찾았습니다.

정해진 규칙과 규율 위주 보호시설

보호시설은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시설 생활은 성향이 맞지 않거나 상대하기 어려운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유와 존엄을 좇아 집을 나온 저로서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취침·기상은 물론 식사 및 귀가 시간 등 개인이 포기해야 할 취향과 자유가 너무 많았습니다. 원활한 공동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시설의 보호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청소년 신분으로 집을 계약한다거나 시설 외에 다른 주거환경을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보호시설에 남거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가정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저로서는 경제적 자립기반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시설에 있는 동안 다양한 직업훈련과 인턴십, 구직활동을 했습니다. 결국 취직에 성공했습니다만, 정작 시설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집을 계약할 보증금 마련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를 만났습니다.

참여연대와 천주교인권위원회,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등 80여 개의 사회·종교·복지·주거·청년단체 회원들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집걱정 끝장, 대선주거권 네트워크’를 발족하고 18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부동산 투기근절 및 자산불평등 완화 등 2개 요구안등을 내용으로 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야구경기를 형식으로 한 행위극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탈가정 후 자립과 미래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는 이름만큼 무척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내 삶과 선택을 존중받았고, 내 선택에 따른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는 걸 알게 해준 곳입니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내게 무한 관심을 가져주고,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주었습니다.

즉,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는 제가 경험한 주거 형태 중에서 가장 ‘집(가정)’에 가까웠고, 제가 지향하는 ‘가족’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정해진 규칙이 없어도 대화와 타협, 자율과 책임을 바탕으로 더 훌륭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규칙, 규율, 억압이 없어도 청소년을 위한 훌륭한 주거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내가 ‘나’로서 완벽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한번도 내 의견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거나, 내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당한 적이 없습니다.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했고,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했을 때 한번도 무시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을 서로 나눴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저는 ‘나’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활동가는 나를 대변하지 않았고, 내 이야기를 나의 방식대로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해주고, 함께했습니다. 덕분에 정신적 안정을 찾고, 땅에 떨어진 제 자존감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의욕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주거복지지원 제도도 이런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모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주거 공간=시설’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제는 ‘집’이라는 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집이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 내 일상생활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곳, 나의 동거인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곳,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탈가정 청소년을 위해 이제부터라도 보호시설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주거환경에 대해서 고민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외면하지 말아야 할, 주거 위기 청소년의 집

왜 우리 사회는 주거 위기에 놓인 탈가정 청소년에게 ‘집’을 제공하지 않는 걸까요? 다른 대안이 없었던 이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거나, 시설에 입소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집’을 제공해줘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주거가 미치는 영향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안이 현재의 시설 형태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설은 집이 아닙니다. 탈가정 청소년에게 진정한 형태의 ‘집’이 주어진다면 중단된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건전한 사회진출을 고민하면서 인생의 목표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위안과 안정,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집을 제공함으로서 이들이 더이상 방황하지 않고 우리 사회 일원으로서 제 구실을 할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주변 사람의 존재와 역할이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탈가정 청소년의 주거 불안정 문제를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들을 낙인찍고 외면할 게 아니라 이들의 주거 불안정에 대한 실태 조사와 더불어 이들을 위한 주거복지 시스템 구축 및 서비스를 병행해야 합니다.

저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적으로 한층 성숙해졌습니다만, 이곳에서 나오고나서 막연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나의 삶을 응원했던 사람들의 곁을 떠나 홀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그만큼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상한나라’에서 출국한 ‘앨리스’들과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네트워크 가족’으로 다시 만난 건 그런 면에서 행운이었습니다. 한 공간에 함께 살지 않아도, 잦은 교류를 통해 서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을 나누고 삶을 응원하는 가족이 있음을, 그 가족의 존재가 인생에서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가족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바뀌듯 가족의 구성과 형태, 내용도 바뀔 수 밖에 없는데, ‘네트워크 가족’은 새롭게 등장한 주거와 집,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활용해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교류와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이라는 건물과 공간이 아니라 주위에서 내 삶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때 시설에 국한해서 탈가정 청소년을 보고할 것이 아니라 ‘이상한나라’ 같은 형태, 자율과 책임이 주어지는 소가족 형태로 돌봄을 하는 시스템도 고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보호자의 보호와 돌봄을 받아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청소년들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자기만의 공간이 있으면 탈선한다는 생각은 선입견입니다. 탈가정 청소년 주거권에 대해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대선 때 정책으로 검토되기를 바랍니다.

외면하지 말아야 할, 주거 위기 청소년의 집

청소년의 존엄과 선택은 주거복지뿐만 아니라 청소년 복지정책 전반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존엄이란 한 개인이 존중 받을 만큼 가치 있으며,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타고났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존엄을 해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대한민국 ‘어른들’ 다수는 ‘청소년=어린아이, 보호, 선도, 돌봄, 학생, 공부’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 당사자의 선택과 무관한 보호나 돌봄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청소년 의무교육, 보호자에 의한 돌봄, 그 외 여러 지원은 모두 다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탈가정 뒤 자립해서 살아가는 청소년, 의무교육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로에 맞는 교육을 받거나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청소년들과 다른 선택지를 하고, 소수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가 그들을 꾸짖거나 ‘비행 청소년’이라고 낙인 찍어서는 안 됩니다.

참여연대와 천주교인권위원회,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등 80여 개의 사회·종교·복지·주거·청년단체 회원들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집걱정 끝장, 대선주거권 네트워크’를 발족하고 18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부동산 투기근절 및 자산불평등 완화 등 2개 요구안등을 내용으로 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야구경기를 형식으로 한 행위극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지금이 존재한다는 것, 내일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

자존감과 존엄성을 찾기 위해 탈가정한 선택, 생존을 위해 보호시설에 들어간 선택,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를 만났던 선택, 이상한나라에서 출국한 뒤 네트워크 가족을 만들게 된 선택이 한데 모여 지금의 ‘저’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특정 주거 형태나 청소년들의 선택을 “옳다, 옳지 않다. 없어져야 한다”라고 낙인찍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부류의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청소년을 포함한 인간의 존엄은 자기 삶의 순간마다 자신의 선택대로 행동하고, 그 선택을 존중받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탈가정 청소년 개개인의 선택이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만드는 일은 우리 사회의 몫입니다. 그 출발은 시설 형태의 보호시설과 더불어 안식과 평온, 더 나아가 존엄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다양한 형태의 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는 18~24살 여성 청소년(‘앨리스’라고 부름)들 4~5명이 사는 주거공간입니다. 이곳에서는 활동가들이 상주하지 않고, 일주일 중 3일만 와서 자고 나머지 4일은 청소년들끼리만 생활합니다. 탈가정 청소년의 주거권 보장을 고민하며 2013년에 만들어 2021년까지 운영했습니다. 자립팸은 청소년들에게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집’, ‘고정된 규칙이 아닌 움직이는 관계가 있는 집’, ‘두 발 뻗고 맘 편히 쉴 수 있는 집’, 그리하여 ‘살고 싶은 집’을 지향하는 공간입니다.

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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