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여성들의 빛바랜 가족사진, 굴곡진 '소수자의 역사'가 되다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 (14)]

이길보라 입력 2022. 1. 1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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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으로부터 출발해 새로운 역사 쓰기

[경향신문]

“혼자 쓰고 읽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수업, 보라글방에서 종종 등장하는 피드백 중 하나다. 꾸준히 글을 쓰는 훈련을 하며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공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제시된 글감에 맞춰 글을 쓴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를 어떻게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완성된 글을 제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글을 사려 깊게 읽고 피드백을 하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글과 글을 쓴 작가가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며 합평한다. 동료들의 시선을 경유하여 다른 시각으로 읽어내기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나’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기를 연습한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온전히 전달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눈 밝은 독자에 의해 그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기도 한다. 퇴고의 길이 열린다. 동료들은 첫 번째 독자가 되어 글과 세상이 만나는 길목에 서서 서로 조언하고 격려한다. 혼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다.

가족사진을 중심으로 진행한
재일조선인 여성들의 워크숍
아이누족 등 다른 소수자들과도
차별과 혐오, 공통의 경험 공유

가족사진을 중심에 둔 역사 쓰기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 ‘미리내’가 엮은 책 <보통이 아닌 날들>은 가족사진을 중심에 두고 진행한 워크숍의 결과물이다. 말 그대로 가족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생애사 프로젝트다. 재일조선인이자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빛바랜 가족사진을 꺼내 이와 연결된 기억을 하나둘씩 꺼낸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 사진을 어디서 어떻게 찍었는지, 왜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옷을 차려입었는지, 얼마나 귀한 옷이었는지, 인화된 사진은 어디로 보내졌는지 이야기한다.

가족사진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때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선명한 것도 있지만 가물가물한 것도 있다.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이를 만나 이야기를 청해 들어야 한다. 나이 든 부모를 만나 새삼스레 옛날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친척과 지인을 통해 기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수집한 이야기가 어떤 맥락 안에 자리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시대상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일조선인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우리 가족은 왜 일본으로 오게 되었는지, 가족들은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과 노력을 했는지, 나는 재일조선인 2세, 2.5세, 3세로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가족사진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진의 맥락을 파악하다보면 가족의 위치를 가늠하게 된다. 이는 나와 가족이 사회·문화·정치적으로 어떤 지형에 서 있는지 이해하는 일로 확장된다. 재일조선인이자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확립하는 과정이 된다.

가족사진을 찍은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한국에 있는 그리운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엄마가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등등 셔터를 누르기 전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동네 사진관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진을 찍던 날 일본에 살면서 꼭꼭 숨겨두었던 치마저고리와 바지저고리를 입었는지, 특별한 날에만 꺼내 입던 양복을 입었는지,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었는지 말하다보면 그날의 풍경과 촬영 목적이 드러난다. 일상의 풍경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스냅 사진이 아닌, 말끔하고 정갈하며 행복한 순간을 연출하여 찍은 가족사진이 어떻게 조선의 가족에게 보내지는지 서술하는 일은 조국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음으로써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온 이들의 역사적 자료가 된다.

재일조선인 여성들은 나를 둘러싼 가족의 역사를 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워크숍을 통해 타인의 역사와 잇는다. 나의 경험이 당신의 것과 어떻게 같은지, 재일조선인 남성과는 무엇이 다른지, 재일조선인 2세와 2.5세, 3세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들여다본다. 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역사를 새롭게 쓴다. 이 책을 감수한 재일조선인 3세 조경희 교수는 가족사진 프로젝트를 “각각의 커뮤니티의 은밀한 역사를 공유하고, 같음과 다름을 확인함으로써 친밀권을 보다 열린 관계성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실험적인 시도”라고 명명한다.

자문화기술지로서의 가족사진 프로젝트

재일조선인 여성들이 시작한 가족사진 프로젝트는 일본 사회에서 마이너리티, 소수자로 살아온 피차별부락, 아이누, 오키나와, 베트남, 필리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확장된다. 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에서 가장 최하층에 위치한 불가촉천민이 살아온 마을을 일컫는 피차별부락 출신의 부락민 여성,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의 도호쿠 지방, 러시아의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에 정착해 살던 아이누 민족 여성, 일본 오키나와현과 가고시마현의 아마미 제도에서 살아온 류큐 민족 여성, 난민으로 베트남에서도 일본에서도 외국인 취급을 받는 베트남 출신 여성, 일본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오키나와에서 자란 여성까지. ‘○○인’이라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여러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이 가족사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민족·언어·문화적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지닌 이들은 프로젝트를 통해 서로가 가진 교차성을 발견한다. 출신지와 민족은 다르지만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살아왔던 공통의 경험을 통해 연결된다. 사회의 바깥 지점에 서 있는 소수자의 이야기는 그 사회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피차별부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구마모토 리사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부락 밖의 사람들이 오히려 부락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

이렇듯 차별과 혐오는 바깥으로부터 온다. 가족사진 프로젝트를 통해 이들은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경유하여 일본 사회를 직시한다.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는 부록으로 실린 ‘가족사진으로 본 역사 연표’다. 프로젝트를 수행한 필자들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이 한눈에 보기 쉽게 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 옆에는 필자들의 개인사가 나열된다. 이화자의 어머니가 나가노현에서 태어나고, 니시다 마쓰미의 아버지가 고베 대홍수로 집을 유실하고, 황보강자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미리내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반대운동을 하는 등 필자를 비롯한 단체의 사적 역사가 공적 역사와 나란히 기술된다.

가족사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결과물을 엮고 이를 바탕으로 연표를 만드는 일은 일종의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다. 연구자 자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연구하여 기록하는 문화기술지적 방법이 차용되는 질적 연구방법 중 하나다.

주관과 객관 사이를 오가며
나와 세상의 연결고리를 찾을 때
가족사진이라는 사적인 소재는
비로소 사회적 담론으로 발전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자아를 경유하는 논픽션 작품

김옥영 작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입문서 <다큐의 기술>에서 “다큐멘터리란 장르 자체가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독특한 장”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은 두 개의 자아를 가져야 하는데 “대상과 진심을 나누고 신뢰를 쌓는 주관적 자아가 있는 한편,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의심하며 판단하는 객관적인 자아도 있어야” 한다고 쓴다. 이는 논픽션 영화인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논픽션 장르의 글쓰기에도, 자문화기술지 연구방법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모든 이야기가 글이 되고 책으로 엮어져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가족사진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자아 사이를 오가며 나와 세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때 이야기는 비로소 사회적 담론이 된다.

가장 사적인 가족사진을 역사의 중심에 두는 시도, 그 옆에 누구의 가족사진을 둘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선택, 그 사이와 빈틈을 어떻게 이을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학습과 연구,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동시에 가장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실험이 바로 논픽션 장르의 글쓰기이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일 테다.

책 <보통이 아닌 날들>은 한 장의 가족사진으로부터 출발하여 도저히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일본 사회의 소수자 집단을 경유한다.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되짚으며 일본 사회를 반추함으로써 소수자 집단의 여성이라는 세계를 구축하고 개별 단위를 연결해낸다.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제작자인 김옥영은 “다큐멘터리는 확정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변화하는 현실을 마주하며, 그 변화 속에서 감독의 시선도 성장해나가는 장르”라고 쓴다. 아무런 규칙도 정답도 없는 과정을 오롯이 횡단해나가며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논픽션 작품을 만드는 묘미이자 난제일 것이다. 이에 대해 김옥영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실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라글방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이길보라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저서로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등이 있고, 연출한 영화로는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이 있다.

이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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