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연백·베이징을 떠나 부산에서 새 삶을 연 이들
[경향신문]
부산시가 한국전쟁 당시 피란수도 부산에서의 생생한 경험담을 수록한 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을 18일 발간했다. 부산시가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추진한 연구용역의 결과물이다.
부경대 구술채록사업단이 2020년 5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피란수도 부산을 경험한 62명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고, 이 가운데 생생한 경험담을 소개한 40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자료집을 제작했다.
구술자들은 제각기 사연을 안고 전쟁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으나 눈앞에 펼쳐진 암담한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인민군 징집 도중 탈영해 혈혈단신으로 피란길에 오른 사람, 전쟁고아가 된 사람 등 낯선 부산에서 험난한 피란생활을 감내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구술자 중 대다수가 1953년 1월 일어난 국제시장 대화재, 그해 11월 일어난 부산역전 대화재, 1954년 12월 용두산공원 대화재를 목격했거나 참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기억하는 이도 많았다.
구술자 중 한 명인 김동주씨(88)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공산당이 집권 후 토지개혁을 하면서 재산을 몰수당했다. 전쟁이 터진 뒤 인민군에 징집되기 싫어 시골집에 숨어지냈고, 전황이 바뀌어 국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길에 올랐다. 조부모와 두 동생은 고향에 남겨둔 채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흥남에서 화물수송선 LST홍천호에 몸을 실었다. 추운 겨울 기름이 흥건한 배 밑바닥에서 끼어 앉아 깡통 하나로 물을 마시고 소변도 봐야 했던 당시 상황이 김씨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틀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거제도. 김씨는 부산항 4부두에서 기름통을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피란민이 세운 천막학교인 명사고등학교를 다녔고 우여곡절 끝에 만 22세 때 부산대 의대에 입학했다. 1969년 광안동에 소아과 의원을 개업한 뒤 2002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북한에 남겨놓은 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2005년 브로커한테 3000달러를 주고 옌볜에서 동생을 만났어. 이틀밤을 같이 잤어.” 김씨는 2015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함북도민회에서 만든 영락공원과 기념관 재정비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설분선씨(87)의 고향 황해도 연백은 1945년 38선이 그어질 때만 해도 남한 땅이었다.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북쪽 땅이 됐다. 목선을 얻어 타고 6명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미리 피란을 떠난 오빠들은 김해에서 재회했다. 오빠들은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입고 김해로 이송된 것이었다. 오빠들이 부산 하얄리아부대에 취업하게 되면서 부산 범내골의 삶이 시작됐다.
설씨는 삼성메리야스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실을 감거나 목덜미 부분을 재단가공하는 일이었다. 미군부대 여자 문관이 되고 싶었지만 집안 가장인 큰오빠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평안도 사람과 결혼해 우암동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설씨는 치매예방 보건소에 다니며 뇌건강을 위해 며느리와 손녀에게 손편지를 쓰고 있다. 새로 시작한 글쓰기이지만 문학소녀로의 창의성과 작가의 감성을 키우고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권혁우씨(78). 권씨의 할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성녀 여사이다. 안 여사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로부터 고문을 당했지만 중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에는 자료가 거의 없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권씨는 해방 후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서울 쌍림동에 정착했으나 1·4후퇴 때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정착했다. 부산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영도의 적산가옥을 마련해줬다. 강냉이죽, 말린 강내이빵으로 쑨 죽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휴전 후 1954년 안 여사가 별세하면서 시로부터 받던 지원도 끊어졌다. 1977년 권씨의 모친인 오항선씨가 서훈을 받게 되면서 독립유공자를 위한 대연동 광복촌에 입주할 수 있었다. 권씨는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추모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을 하고 있다.
권기정 기자 kw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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