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빛 - 윌리엄 포크너 [성기완의 내 인생의 책 ③]
[경향신문]
1991년 초여름, 입대 날짜를 받아놓고 뒹굴뒹굴하던 때였다. 거실 책장에 꽂혀 있던 전집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건 실수였다. 소설을 손에서 놓기도, 그렇다고 들고 있기도 싫었다. 장마철의 습기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답답함에 휩싸인 채 이 소설을 읽어내려 갔다. 우선 너무 길고 지루했다. 읽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특유의 비비 꼬인 문장을 번역투의 한글로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포크너의 열렬한 팬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선 ‘시간의 사용’이 너무나 독창적이었다. 미래로 가고 있는 하나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에서 가지를 친 몇 갈래의 시간이 과거로 달려간다. 그랬다가 다시 미래를 향해 거슬러 오는데, 끝내 미래로 가지 못하고 기준이 되는 그 ‘하나의 시간’에 합류한다. 다층적 레이어의 시간들을 멀티트래킹하는 면에서 포크너는 유일무이한 대가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가기에 이 소설은 의식 흐름을 리얼하게 재현한다. 그 안에서 미국 남부의 흑인과 백인이 얽히고설킨다. 가혹하고 끔찍한 운명들. 그 정체가 ‘너와 나는 하느님의 목적과 복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잔인하게 밝혀진다. 포크너는 가차 없다. 흑인이라고 쉽게 동정하지 않고 자기가 백인이라고 백인들을 감싸지도 않는다. 불행과 죄와 그 치명적인 결과들을 파헤쳐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내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 미국 남부에서 발생한 흑인 음악인 블루스(Blues)를 내 음악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소설은 가슴을 저미는 블루스의 마력 뒤편에 어떤 삶의 구조가 있는지, 그 어떤 연구서보다도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포크너가 순전히 문장만으로 이런 비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진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기완 | 시인·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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