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사유는 고뇌 아니었나.. 그런데 당신은 왜 미소짓나
②소설가 이승우가 머문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야 한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바라며 천천히 걸어야 한다. 걷다가 멈춰 서서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흑백 영상과 마주해야 한다. 물의 변화를 통해 순환하는 세계를 시각화한 이 영상은 프랑스인 장 쥘리앵 푸스의 작품이다.
그가 영원히 이어지는 실체란 없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한 그 영상에서 나는 광활한 우주의 일부를 본다. 우주는 육안으로 볼 수 없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주를 보려면 우주만큼 커져야 한다. 요컨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을 때 나는 그 방에 전시된 두 점의 반가사유상만을 생각했다. 바라보는 각도와 놓인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그 신비한 미소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깊이 사유하는 이의 얼굴이 어떻게 미소로 표현되었을까, 하는 내 오래된 의문의 답을 찾고 싶었다.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반가사유상이 놓인 공간에 먼저 압도당할 줄은 몰랐다. 건축가 최욱은 이 방을 비일상적 공간, 사유가 육화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둑한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별들이 촘촘히 박힌, 끝없이 넓고 무한한 우주에 당도한 것처럼 느꼈다. 우주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꼈다.
반가부좌를 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뺨에 손가락을 댄 채 생각에 잠긴 ‘사유’상 앞에서 나는 왜 미소인가? 하고 묻는다. 그 답을 얻기 위해 긴 시간, 앉거나 서서 보고 살피고 말을 건다. 밤은 고인 듯 느리게 흐르고 사방은 고요하고 내 사유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어쩐 일인지 나는 사유를 고뇌와 거의 같은 뜻으로 이해해왔다. 가령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필사적으로 사유하고 있다’고 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한다. 울퉁불퉁한 남자의 근육과 웅크린 몸, 그리고 고뇌하는 표정이 나에게는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사유는 필사적으로 하는 것이고, 사람이 필사적일 때 만들어지는 것은 주름이지 미소가 아니다. 그런데 이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나는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기. 그것이 내 생각의 방법이다. 생각 속으로 들어갈 때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생각 속으로 들어갈 때 ‘나는 나와 동행한다.’ 이것은 걷기와 사색을 연결해 말한 프레데리크 그로의 문장이다. 나는 묻고 대답한다. 묻는 나와 대답하는 나는 같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이다. 마치 거울 앞에 있는 사람과 같다.
‘사유의 방’에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직접 보기 전에 나는 두 작품이 같거나 아주 많이 비슷해서 구별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눈앞의 두 작품은 크기, 표정과 옷차림, 쓰고 있는 관, 손의 위치가 다르다. 심지어 미소조차 같은 미소가 아니다. 사유의 시각화라고 할 만한 기획이다. 같음을 사유하는 사람은 다름을 볼 것이다. 다름을 사유하는 사람은 같음에 도달할 것이다.
시간은 밤의 정적 속에서 느리게 흘렀다. 뒤편 벽에 기대 서서 반가사유상을 제작하기 위해 점토를 덮고 밀랍을 입히고 청동물을 붓는 천몇백 년 전의 장인들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나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작업을 했을지 상상했다. 그러자 사유의 한 형태인 명상이 떠올랐다. 초월을 사유하는 것이 명상이다. 초월이 가로지르기이면서 동시에 상승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왜 횡단하는가. 건너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는 왜 상승하려고 하는가.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니까 반가사유상의 저 미소는 그들이 사유의 끝에서 마주할 ‘너머’의 선취(先取)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사유의 방’에는 어떤 설명도 없다. 국보인 두 점의 ‘반가사유상’의 가치에 대해서도, 이 방을 디자인한 건축가의 의도에 대해서도 설명하는 글이 없다.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사유라는 듯. 방에서 나가면 다시 일상을 살 것이다. 그러나 사유의 우주를 경험한 사람은 이미 어제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세상이 조금씩 밝아질 때 나는 ‘너머’를 선취한 자의 미소를 애써 모방하며 ‘사유의 방’을 떠났다.
☞이승우 소설가는
1959년생. 감성보다 이성의 작가. 젊은 시절 신학도였고,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지상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받는 등 유력 문학상을 대부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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