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허구 사이 아슬아슬 줄타기.. "진정성은 지켜야"
1987년 민주화의 결정적 시기 배경
北간첩·안기부 등 민감한 소재 다뤄
당시 대학가 곳곳 시위·추격전 한창
드라마 속 캠퍼스엔 봄꽃만 흐드러져
당대 살았던 대학생들의 모습 폄하
여대생들의 주체적인 모습들도 퇴색
역사인식 부족 지적 속 불편함 커져
"피해자 존재 사안엔 윤리기준도 필요"
◆뚜껑 열어보니 어떤 내용?
1987년 봄, 임수호(배우 정해인)와 호수여대 재학생 은영로(배우 지수)가 미팅에서 처음 만난다. 백골단을 몰고 다니는 사복경찰의 검문을 피하려는 수호를 운동권 대학생으로 오해한 영로가 임기응변으로 그를 구한다. 이후 12월, 베를린대학 유학생으로 위장한 남파 공작원 수호는 작전 수행 중 부상을 입고 기숙사로 황급히 도망쳤다 영로와 재회한다. 안기부에 쫓기던 수호는 영로 덕에 위기를 모면하고 영로는 수호를 보살핀다. 기숙사 오픈 파티 당일 수호는 영로의 파트너로 위장해 기숙사를 무사히 빠져나간다. 그러나 다시 안기부 이강무(배우 장승조) 팀장에게 쫓기게 된 수호는 기숙사로 돌아오고, 학생들을 인질로 잡아 안기부와 대치한다. 함께 인질이 된 강무는 수호에게 각자가 수행해 온 작전의 실체를 알린다. 12월 남한의 대선을 앞두고 남북한 권력층이 야합한 것. 남한은 안기부 비자금으로 북한 당자금을 주고, 북한은 남한 여당이 대선에서 압승할 수 있도록 야당인사 간첩몰이 ‘북풍’을 돕는다는 것. 결국 당에 충성한 공작원과 안기부 직원, 인질들은 대선 전날 모두 사살될 것이란 이야기다.
8화에서 강무는 가까스로 기숙사를 탈출해 사살조 투입을 요청하지만, 군인들은 강무를 구하고 사살조를 투입하기는커녕 그에게 총을 겨눈다. 각성한 채 기숙사로 돌아온 강무는 수호에게 함께 힘을 합쳐 인질을 구하고 기숙사를 탈출하자고 제안한다.
“이거 남북 윗대가리들이 짠 대선 공작인 거! 선거에서 압승하려먼 기숙사에 갇힌 인질을 모두 구출해서 국민을 기쁘게 하는 게 유리할까, 모두 죽여서 국민을 분노케 하는 게 유리할까. 당연히 후자겠지. 모두 죽어야 대북 경각심이 커져서 여당을 찍을 테니까!”
믿지 않는 수호를 강무는 계속 설득한다. “남북합작 대선공작에서 너나 나 같은 졸개들은 그냥 이용당할 뿐이라고!”
8, 9회에 수호의 내면 갈등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드라마는 남북 권력층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대사들을 쏟아낸다. 강무는 ‘변절’을 갈등하는 수호에게 “자기를 구해준 여자를 사랑하는 게 변절이야? 그럼 당에 충성한 공작원들 목숨을 돈에 팔아넘기는 건 뭐지?”라고 따지고, 수호는 강무를 향해 “정권의 횡포에 맞서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이는 안기부, 공안정국 만들려고 죄없는 동포들의 인생을 짓밟아온 정권의 개! 그게 안기부잖아. 거기서 월급 받아 처먹던 놈이 지금 누굴 비난해!”라고 맞선다. 강무는 결론낸다. “따지고 보면 다 똑같아. 북송이란 이벤트로 재일교포들을 속여서 수많은 교포들 인생을 짓밟은 북한 정권이나, 공안정국 만든 남한 정권이나.”
◆여전한 불편함
하지만 드라마에서 안기부를 비난하는 대사가 아무리 쏟아져 나와도 역사왜곡 논란이 불러일으킨 불편함과 거부감은 시원스레 씻기지 않는다. 명문대생 남자주인공이 여대 기숙사로 흘러들어오며 벌어지는 사랑이야기라며 관심을 끌려 했던 홍보전략의 구태의연함만큼이나 시대를 다루는 방식이 안일하게 느껴져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직접적인 역사왜곡 우려는 해소됐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라며 “시대를 대하는 작가의 자세, 진정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987년도라는 시대의 무게를 끌고 와놓고, 작품이 그 무게를 온당히 감당해 그에 맞는 태도로 그렸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과 운동권 내 가부장주의라는 이중전선에서 격렬하게 싸웠던 주체로서의 여대생들의 역사는 무시된다. 운동권 오빠를 그리워하고, 오빠가 생각나 운동권 남학생으로 착각한 임수호를 간호할 뿐인 영로를 대표로, 학생들은 운동권 주체의 누이, 보조자이거나 방관자다. 운동권 학생 딱 1명이 등장하지만 구색맞추기다. 기숙사는 ‘사생회장’ 완장을 찬 사법고시생이 학생들을 제지하고 통제하며, 학생들은 미팅에 환호하거나 기숙사 행사에서 파트너와 쌍쌍파티를 벌이는 모습이 훨씬 많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학원민주화 투쟁 끝에 직접선거로 학생자치를 실현한 1987년이 아니라 오히려 학도호국단이 지배하고 학생들이 쌍쌍파티를 벌이는 1960∼70년대 모습과 닮았다.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진 해의 대학이라는 사실은 지워진다. 기숙사에 조명이 8개쯤 달린 거울이 다닥다닥 늘어선 분장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실제 있지도 않은 ‘파우더룸’ 논란으로 혐오의 대상이 됐던 여대의 수난기까지 떠오른다. 기숙사 전화교환원 계분옥(배우 김혜윤)에게는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여대생들’에게 품은 악의와 열등감을 정당화하는 서사가 부여된다.
88학번인 한 시청자는 “당시 거의 모든 학생이 민주화운동을 했고, 6·29선언 후 학원 자유화 투쟁, 대선 직전 선거운동으로 3학기가 될 때까지 시험도 보지 못한 혼란기였다”며 “너무 평온하게 그려져 시대상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매회 일제강점기 들어온 일본어투 외래어 표기인 ‘뽀나스’ 영상이 나오는 것을 보면, 결국 금지된 사랑 서사에 레트로한 스타일을 주기 위한 배경이나 장식품으로 1987년을 끌고 왔다는 의구심이 든다.
정덕현 평론가는 “당대를 살았던 대학생을 그리는 면에 있어 굉장히 폄하된 부분이 있다. 여대생들이 작품 속에서 그렇게 바보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다. 실제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학생들이 더 많이 등장하고, 그 상황 안에서도 좀 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들이 많이 있을 법도 한데, 작가가 조정하는 틀 안에서 수동적으로 상황들을 보여주는 것 정도”라며 “당대를 살았던 여성이라면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극의 윤리
설강화 논란은 시대극, 역사극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시사점을 보여준다. 정 평론가 “해석이 있고 상상력이 더해질 수 있다. 상상이 과도하면 ‘아 이거 완전 허구구나’라고 수용할 수 있게 그려내면 되고, 특정시대가 있다면 그에 맞는 무게감으로 이야기를 끌면 된다”며 “그게 시대에 대한 접근의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하재근 평론가는 “우리나라는 양쪽의 강대국으로부터 역사침탈을 당하고 있는 만큼 현실에서 악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삼가야 하고 현대로 가까워질수록 예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설강화의 극 초반 영로가 간첩을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해 보호하는 설정은 우려를 살 만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돼 있는데 국민이 모르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편 정치인들이 논란을 일으킨 것이 불과 2019년의 일이다. 강혜원 평론가는 “창작의 자유가 있다 해도, 사회적으로 공개됐을 때는 현실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며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안에 특히 윤리기준이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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