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 혹은 도피

최재봉 2022. 1. 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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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탐문]최재봉의 탐문 _09 술

들으니 청주는 성인에 비유되고
탁주는 현인에 비유된다 말했겠다

성인과 현인을 나 이미 마셨으니
구태여 신선을 구할 필요 있으리오

술 석 잔을 마시니 대도에 통하고
한 말 술 마시니 자연과 합하도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수주 변영로(1897~1961)가 1953년에 낸 회고록 <명정 40년>에서 제목에 쓰인 ‘명정’(酩酊)은 몸을 가눌 수 없도록 크게 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제목처럼 무려 대여섯 살 무렵에(!) 시작해 평생을 이어 온 음주 역사와 그에 얽힌 일화를 재미나게 엮어 놓아 큰 인기를 끌었다. 김병익이 <한국문단사>에서 소개한 ‘백주나체승우(乘牛)’ 사건이 대표적이다. 공초 오상순과 횡보 염상섭, 성재 이관구(언론인)와 수주까지 네 사람이 어느 날 대낮에 명륜동 산자락에서 펼쳐진 술자리에서 대취해서는 입고 있던 옷을 다 찢어 버려 알몸인 채로 소 등에 올라타고 비탈길을 내려와 큰길까지 진출했던 일이다.

<명정 40년>뿐만이 아니다.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의 회고록 <문주반생기>(1960)는 제목 그대로 문학과 술로 점철된 지난날을 역시 흥미롭게 풀어내 <명정 40년>과 짝패를 이룰 만하다. 부산 피난 시절을 다룬 김동리의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 시인 고은의 산문 <1950년대>, ‘명동 백작’ 이봉구의 문단 회고록, 소설가 이문구의 문인 스케치 등 문인과 문단을 다룬 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누룩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어디 한국만이랴. 세계의 어느 구석이든 문학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단짝처럼 또는 그림자처럼 술이 따라붙는다. 문인들은 대체로 글을 쓰는 것 못지않게 부지런히 술을 마시고, 술기운을 빌려서 또는 취기와 싸우면서 글을 쓰고는 한다.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술꾼이라면 아무래도 중국 당나라 시대 시인 이백을 들어야 할 것이다. 두보와 함께 성당(盛唐) 시기 시 르네상스를 이끈 쌍두마차라 할 이백은 생애 자체가 술과 결부되어 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장진주’ ‘월하독작’ ‘산중대작’ 등 술을 노래한 그의 많은 시편은 오늘날까지 애송되고 있다.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야/ 하늘엔 주성(酒星)이 없었을 것이고// 대지가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야/ 땅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 하늘에 부끄럽지 않도다// 들으니 청주는 성인(聖人)에 비유되고/ 탁주는 현인에 비유된다 말했겠다// 성인과 현인을 나 이미 마셨으니/ 구태여 신선을 구할 필요 있으리오// 술 석 잔을 마시니 대도(大道)에 통하고/ 한 말 술 마시니 자연과 합하도다// 취중의 흥취를 얻으면 그만이지/ 깨어 있는 자에겐 말하지 말라”(‘월하독작’ 제2수)

술에 관한 한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 역시 이백에 뒤지지 않는다. 그의 시집 <루바이야트>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현세적 삶의 대안으로 종교나 진리 같은 초월적 가치 대신 술을 마시고 즐기라는 쾌락주의적 지침을 제시한다.

“술을 마셔라, 이야말로 영원한 삶이니라/ 이야말로 젊음이 네게 주는 선물이니라/ 꽃 피는 계절, 술과 취기 오른 벗들과 함께/ 이 순간을 즐겨라, 이야말로 삶이니라”(<루바이야트> 중)

술을 예찬한 시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테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왜 그토록 술에 빠져드는 것일까. 정현종의 ‘술 노래 1’이라는 시에는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술과 언어 사이에 모종의 관련성이 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실제로 술자리란 말의 성찬이 차려지는 장이기도 하다. 술에 취한 사람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대화를 나누고자 술을 마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술이 언어를 활성화시킨다는 관찰은 프랑스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 <불의 정신분석>에도 나온다. 이 책의 6장은 ‘알코올: 타는 물’이라는 꼭지로 시작하는데, 이 글에서 바슐라르는 이렇게 썼다. “분명 알코올은 언어를 만드는 한 요소다. 알코올은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 구문을 해방시킨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불꽃의 말’이라는 산문에서 “술은 말의 예비자이며, 말의 부피를 불리는 희한한 공기”라고 쓴 데에서는 그가 애정했던 바슐라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글쓰기가 내 음주벽과 서로 엮여 있다는 의혹이 든다. 술이 주는 흥분과 상상이 주는 흥분은 아주 흡사한 면이 있다.”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던 미국 작가 존 치버의 일기 한 대목 역시 술과 문학의 관련성을 알려준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정신과 전문의 정유석은 2005년에 낸 책 <작가와 알코올중독>에서 미국 작가 22명의 알코올중독 사례를 다룬 바 있다. 영국의 논픽션 작가 올리비아 랭 역시 <작가와 술>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존 베리먼, 치버, 레이먼드 카버 등 미국 작가 여섯 사람의 알코올중독과 문학의 관계를 파고들었다. 그 자신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던 미국 작가 레슬리 제이미슨도 ‘회복’이라는 뜻을 제목 삼은 책 <리커버링>에서 자신의 경험과 선배 작가들의 사례를 들어 가며 알코올중독의 세계를 탐사한다.

이런 책들이 연이어 나올 정도로 미국 작가들의 알코올중독은 유별나고 자심하다. 미국인으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싱클레어 루이스(1930)였는데 그를 포함해 이후의 미국인 수상자들인 유진 오닐과 윌리엄 포크너,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이 하나같이 알코올중독자였다. 1938년 수상자인 펄 벅, 그리고 1976년 수상자 솔 벨로 이후의 수상자들은 다르지만, 루이스에서 스타인벡까지 초기의 미국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여섯 명 가운데 다섯이 알코올중독자였다는 뜻이다. 노벨상을 받진 못했지만 수상자들 못지않게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 잭 런던, 피츠제럴드, 윌리엄스, 찰스 부코스키, 스티븐 킹 등도 마찬가지.

그 자신 알코올중독 가정에서 자란 랭은 여섯 작가의 흔적을 좇아 미국을 종횡하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했는지, 술은 그들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한다. 그렇게 알코올과 문학의 관계를 궁구한 랭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것이 알코올중독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다. 처음엔 연금술 같은 마력을 발휘해주다가, 중노동을 떠안기고, 마지막엔 작가 자신의 어느 정도의 거들먹거리는 타락성과 어느 정도의 끔찍한 측면을 부추겨 벽난로 바닥, 중심부의 불길 속에 집을 짓게 만들어 아직 끝내지 못한 과업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그러니까 알코올이 제공하는 것은 영감의 불꽃이나 언어의 폭죽이 아니라 오히려 창작 활동의 종언이라는 것. 랭은 술에 관한 낭만주의적 신화화에 반대하며, 알코올중독에 걸린 작가라면 술을 끊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랭의 책에서 치유의 사례로 소개한 치버 및 카버와 마찬가지로 레슬리 제이미슨 역시 A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Alcoholics Anonymous)이라는 모임에 나가면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미국 작가들의 알코올중독이 대체로 개인적 배경을 지니는 것과는 달리, 한국 작가들 중에는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원인이 되어 중독에 빠져든 경우도 적지 않다. 현진건의 단편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중독을 초래한 것이다. 시인 천상병은 박정희 정권 시절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애꿎게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나온 뒤 술을 마시며 방황하다가 쓰러져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 친구들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유고 시집 <새>를 출간하기도 했다.

전두환 시절의 ‘한수산 필화 사건’ 때에는 한수산의 동료인 시인 박정만이 국군보안사령부에 붙잡혀 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지만, 그 후유증을 술로 달래다가 마흔셋 생때같은 나이에 간경화로 스러졌다. 숨지기 1년여 전 석 달 동안 그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 죽였”고, 불과 20일 어간에 “물경 300편 가까운 시를 얻었다”고 쓴 바 있다. 죽음을 예감한 시인의 내부에서 고여 있던 시심이 대폭발을 일으킨 셈이다.

<작가와 알코올중독>에 따르면 미국에서 술로 인해 사망하는 비율에서 작가가 술집 바텐더에 이어 2위로 나타났다고 한다. ‘회복’된 소수를 제하면 앞에서 거명한 미국 작가들 대부분이 술이 직간접 원인이 되어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이백의 호방함과 하이얌의 쾌락주의, 정현종의 초대의 말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삶에 윤기를 더하고 글쓰기를 촉진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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