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바비큐 없는 환영파티를 떠올리다

한겨레 2022. 1. 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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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의 우연한 연결]유럽연합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공동체다.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종종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면서 지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토론하곤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유럽 아카데미에 도착한 첫날 저녁, 한국에서 온 청소년들을 환영하는 뜻으로 주최 쪽은 뒷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어주었다. 다양한 고기와 소시지, 신선한 야채 샐러드와 가지가지 제철 과일들, 풍성한 식탁이었다. 풍요로운 만찬에 불편한 마음을 토로한 이는 나무라는 이름의 학생이었다.

물론 저도 먹을 게 없는 건 아니었어요. 야채도 있고 과일도 있으니 먹으면 되죠. 그런데 어쩐지 만찬의 주변부가 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어요.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유럽연합의 토대가 되는 가치라면 식탁에서도 ‘다른’ 방식의 조화를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먹을 게 없는 건 아니라는 것과 맛있는 게 많구나라는 건 매우 다른 에너지와 파장을 만들어내요. 이 학교에는 전세계에서 학생들이 온다고 들었어요. 적극적으로 채식 요리를 개발하고 메인 요리로 만들어내는 것을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민주주의나 지속가능한 발전을 논한다는 건 모순된다고 생각해요.

듣고 보니 합리적인 문제 제기였다. 우리는 둘러앉아 토론을 시작했다. 일주일을 머물며 아침, 점심, 저녁을 학교 식당에서 먹어야 하니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방의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비건과 논비건 음식을 50 대 50으로 해달라고 제안해보자, 일주일에 하루는 아예 채식으로만 먹겠다고 해보자,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여러분, 볼링 시합 할 시간이에요. 스태프 소피아가 부르러 와서야 우리는 토론을 마무리했다. 일단 오늘 나온 의견을 잘 정리해서 주방의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고 조율한다. 회의 참가자는 문제를 제기한 나무와 통역을 도와줄 교사 한명으로 한다. 결론을 내리고 볼링장으로 갔다.

평소에 볼링 좀 쳐본 청소년들은 신이 난 표정으로 어디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어깨를 풀었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의자에 앉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그런데 볼링의 규칙이 좀 달랐다. 핀을 많이 맞혀 점수를 내는 게 아니라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써놓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핀을 쓰러뜨리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러니까 스트라이크로 핀을 모두 쓰러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개나 두개의 핀만 맞혀도 팀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었다. 볼링을 잘 못하는 사람들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규칙을 듣자 모두 의욕적으로 공을 잡았다. 잘 치는 사람들은 스트라이크를 쳐서 환호를 받았고, 한개나 두개의 핀만 쓰러뜨리는 초보자들도 갈채를 받았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니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는 걸 학습이 아니라 놀이로 배웠다. 그 또한 재미있었다.

독일 자를란트 지역의 오첸하우젠 유럽 아카데미에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다 여행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유럽 아카데미를 여름방학 여행지로 정한 건 우리 공부의 주제와 맞닿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종 다양성, 인공지능(AI), 난민, 화성으로의 이주, 새로운 민주주의, 남과 북이 함께 만들어갈 평화체제.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은 어느 한 국가나 지역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피엔스가 머리와 마음을 모아 풀어가야 할 것들이었다. 개별 국가의 이익을 넘어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가려는 시도와 모색과 경험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유럽연합은 어떻게 민족과 국가와 종교와 이념의 경계를 뛰어넘고 변주하며 이유(EU), 즉 유러피언 유니언을 만들어냈는가, 만들어가고 있는가. 마침 유럽 아카데미에서 다루는 주제가 그런 것들이었다. 유럽 통합, 연방주의, 민주주의, 인권, 지속가능한 발전 등.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의 국경 지역에 자리한 오첸하우젠의 유럽 아카데미에서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다 보면 분단과 경계에 꽃을 피울 어떤 힌트를 얻게 되지 않을까. 짐을 꾸려 오첸하우젠으로 향한 이유다.

유럽 아카데미는 1954년에 문을 열었다. 1954년이라면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만들어진 지 2년 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중공업은 대부분 국제적인 관리하에 들어가거나 철거당했다.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위험국가의 자원을 통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 외무부 장관 로베르 쉬망은 1950년 유럽의 석탄과 철강 산업을 통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석탄과 철강은 전쟁물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필수자원이다. 이 자원을 공동관리함으로써 ‘전쟁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통제와 억압을 융합과 협력으로 대체하고자 한 시도에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서독(독일)이 참여하면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탄생했다. 유럽연합으로 이어지는 첫발자국이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탄생하고 2년 후 오첸하우젠에서는 유럽 아카데미가 문을 연다. 처음에는 독일과 프랑스 청년들의 교류의 장으로 시작하지만 차츰 유럽연합의 통합 과정을 촉진하고 교육·연구하는 기관으로 변모 확장한다. 덕분에 우리도 이곳에서 유럽연합의 역사와 지향과 비전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었다. 28개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5년에 한번 직접선거로 선출된 751명의 유럽연합 의원들이 각 나라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초국가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지금의 유럽연합 형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설립 이후 1985년이 되어서야 솅겐조약이 체결되면서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1999년에야 유로가 공동화폐로 사용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시도들은 좌절되고 어떤 시도들은 의심받았으며 어떤 시도들은 비난받았다. 협력과 통합의 과정은 경쟁과 대립보다 지리멸렬하고 종종 비효율적이었지만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출범한 이후 단 한차례도 가맹국 간 전쟁은 없었다. 유럽연합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공동체다.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종종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면서 지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토론하곤 했다.

유럽 아카데미에서 보낸 마지막 밤, 누군가 유럽연합을 넘어 지구연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럽 아카데미 같은 학교를 판문점에 세운다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 학교의 이름은 어싱(Earthing) 아카데미. 인간뿐 아니라 지구에 사는 다양한 생명종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을 넘어 만물의 서사를 함께 써나갈 수 있는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그해 여름, 코로나 시대가 되기 전의 마지막 외국여행에서 우리는 함께 얘기 나눴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대선 토론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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