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억→962억' 급감한 해운 운임 담합 과징금..공정위, 업계·정치권 눈치봤나

이창준 기자 2022. 1. 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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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18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3개 국내·외 컨테이너 정기선사의 한-동남아 항로 해상운임 담합 제재와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정거래위원회가 15년간 120차례 해운 운임을 담합한 국내외 23개 해운사를 대상으로 총 962억원의 과징금을 내리기로 했다. 공정위가 해운사의 운임 담합에 제재를 가한 첫 사례로, 정부는 불법 공동 행위를 법적으로 제한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과징금 액수가 최초 보고서에 담긴 것에 비해 90%가량 대폭 줄었는데, 일각에서는 최근 정치권까지 가세한 업계 발 저항에 공정위가 결국 ‘봐주기식’ 삭감을 해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위는 18일 “총 541차례의 회합 등을 통해 한-동남아 수출·수입 항로에서 120차례 운임을 합의한 12개 국적선사와 11개 외국적선사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고 과징금 962억원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운임 합의 회의를 소집하고 합의된 운임을 지킬 것을 독려한 ‘동남아정기선사협의회(동정협)’에도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1억6500만 원을 부과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 해운사는 지난 2003년부터 15년간 해운사끼리 합의를 통해 컨테이너 화물에의 기본 운임을 올리고 각종 추가 운임을 도입하는 등 방식으로 가격을 조정했다. 합의된 운임을 준수하지 않는 화주의 화물은 선적을 거부하는 한편, 타 선사의 화물은 서로 침탈하지 않도록 하는 합의도 맺었다.

이들은 동정협 등 회의체를 통해 선사들이 합의를 제대로 지키는 지까지 감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고려해운 등 국내 11개 선사는 지난 2016년부터 3년간 수출 항로에서 7차례에 걸쳐 운임 감사를 실시해 합의 위반한 선사들에게는 총 6억3000만원의 벌금도 부과했다. 이들이 대외적으로는 개별 선사의 판단으로 운임을 결정했다고 고지하는 등 담합을 은폐하려고 한 사실도 공정위에 적발됐다.

공정위는 이같은 담합 행위가 공정거래법 상 독점금지 조항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지난 12일 전원 회의 의결을 통해 제재를 결정했다. 위원장이 참여하는 공정위 전원 회의 의결 결과는 법원의 1심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국내 해운법에서는 사전에 신고를 하고, 부당한 운임 인상으로 경쟁을 제한하지 않는 등 일부 제한적인 조건 하에서는 해운사들의 공동행위를 인정하고 있지만 공정위는 이번 담합이 절차 및 내용 모든 측면에서 적법한 공동행위 요건에 벗어난다고 봤다.

해운 업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해운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해운업계는 지난 40여년간 절차를 준수하며 공동행위를 펼쳐왔는데 절차상 흠결을 빌미로 해운 기업들을 부당 공동행위자로 낙인찍었다”며 “해운 공동행위의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해 행정소송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도 “해외국들도 공동행위를 허용하는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으나 공정위는 업계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해운업계를 불법집단으로 매도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처음 공정위가 내부적으로 심사한 내용에 비해 실제 처벌 수위가 크게 낮아진 것을 두고 공정위가 업계 반발을 못이겨 한발 물러선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공정위는 지난해 5월 8000억원 규모의 과징금 부과 등 내용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각 해운사에 통보한 바 있는데, 실제 의결된 과징금 액수는 심사보고서 상의 액수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사보고서는 검찰의 공소장에 해당하는 문서다.

특히 지난해 9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담합 행위에 공정거래법 적용 자체를 배제하는 해운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등 업계의 저항에 정치권까지 가세한 것이 공정위에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정위가 담합 행위에 대한 제재권 자체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결국 ‘눈치보기’식 솜방망이 제재를 내리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정부는 담합행위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경쟁을 제한하는지를 보다 세세하게 따져 과징금을 다소 하향 조정한 것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조홍선 공정위 카르텔조사국장은 “수입항로 같은 경우는 담합 행위가 미치는 범위가 제한적인 측면이 있는 점 등을 감안해 과징금 부과 대상에서 제외했다”며 “해운업의 특성과 이번 공동행위의 특수성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과징금 규모를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준 기자 jch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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