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120마리 튀기고 동틀 때까지 당구..치킨집 폐업 눈물, 한 큐에 날렸죠"

박린 2022. 1. 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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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 사장님에서 프로당구 선수로 변신해 퍼펙트 큐를 기록한 박정근. 김성룡 기자


프로당구 선수가 되고 싶어 5년간 운영하던 치킨집 문을 닫았다. 생계가 어려워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텼다. 그래도 ‘큐’ 만은 놓지 않았다. 마침내 이달 초 프로당구 PBA 챔피언십에서 한 이닝에 15점을 몰아치는 ‘퍼펙트 큐’를 달성했다. 사연 많은 박정근(47)을 최근 경기도 파주시 당구클럽에서 만났다.

“새벽 2시까지 닭 120마리를 튀긴 뒤, 동틀 때까지 당구 연습을 했죠.”

‘퍼펙트 큐’를 달성한 박정근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박정근은 지난 3일 경기도 고양시 빛마루방송센터에서 열린 2021~22시즌 NH농협카드 PBA 챔피언십 16강전에서 2세트 1이닝 시작과 함께 연속 15득점을 올렸다. 세트제 경기에서 한 이닝을 한 큐에 끝내는 ‘퍼펙트 큐’를 달성한 것이다. ‘당구의 홀인원’이라 불릴 만큼 어려운 기록이다. 비록 조건휘에 세트 스코어 1-3으로 졌지만, 박정근은 대회에서 가장 먼저 ‘퍼펙트 큐’를 달성해 상금 1000만원을 받았다.

치킨집 사장님에서 프로당구 선수로 변신해 퍼펙트 큐를 기록한 박정근. 김성룡 기자


박정근은 “사실 큐 팁(큐의 최상단 부분)이 불량이었다. 그래서 시합 당일엔 예비 큐로 쳤다. 그런데 공이 운 좋게 섰고, 예민한 공도 나오지 않았다. 뱅크샷(2점)을 3개 쳐서 14점이 됐다. 마지막 공은 어려운 배치가 아니고 그냥 툭 치면 되는 거였는데 1000만원이 걸린 터라 심장이 떨렸다. 4쿠션으로 마무리했다. 보통 한 세트가 20~30분 정도 걸리는데 이날은 한 큐로 5분30초 만에 끝냈다”고 했다.

고2 때 처음 큐를 잡은 박정근은 오래지 않아 500점 정도(3구와 4구 기준)를 쳤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정수기 회사 판매팀에서 일했다. 김치 배달을 한 적도 있다. 그러다 2004년 의정부의 당구클럽에 갔다가 우연히 선수용 당구대를 처음 봤다. 박정근은 “거기서 ‘당인(진정한 당구인)’ 고 강문수 선배님을 만났고, 그분께 당구를 배웠다. 이듬해인 2005년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30대 초반이었다”고 했다.

치킨집 사장님 시절 박정근. [사진 박정근]
박정근이 운영하던 치킨집 모습. [사진 박정근]


대한당구연맹 대회에 출전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던 박정근은 먹고살기 위해 치킨집을 열었다. 박정근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경기도 일산에서 ‘옛날장터치킨’을 운영했다. 월 매출이 잘 나올 때는 2500만~3000만원 정도 됐다. 새벽 2~3시쯤 치킨집 문을 닫으면 지인이 운영하는 당구장을 찾아갔다. 미리 열쇠를 받아 놨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 동틀 때까지 연습했다. 잠깐 자고 오전 11시에 다시 치킨집 문을 열었다”고 했다.

오른손으로 기름을 탈탈 털다 보니 오른 손목이 안 좋아졌다. 주문량이 많은 금, 토, 일요일에는 새벽 2~3시까지 많게는 100~120마리의 닭을 튀겼다. PBA는 2019년에 출범했는데 박정근은 트라이아웃(선수 선발) 신청을 하고도 가게 사정 탓에 참가하지 못했다.

박정근은 “2020년 치킨집을 접고 프로당구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당구에 미련이 많이 남았고, 당구에 굶주려 있었다. 대회에 나가면 설레고, 그래야 사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또 “생계를 뒤로 하고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제가 결혼을 안 하고 혼자라서 좀 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상황이 맞물려 가게 매출이 줄기도 했다. 그래도 용기를 냈고, 부모님도 결정을 지지해주셨다”고 덧붙였다.

치킨집 사장님에서 프로당구 선수로 변신해 퍼펙트 큐를 기록한 박정근. 김성룡 기자


하지만 후원사의 지원이 끊기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박정근은 “몇 달 씩 집 월세를 못 내기도 했고, ‘내가 뜬구름을 잡으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6개월간 낮에는 레슨을 했다. 또 새벽 3시까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루에 3만~6만 원을 벌었다”고 했다.

박정근은 틈틈이 당구 연습을 병행한 끝에 2020~21시즌 드림투어(2부리그) 6차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상금 1000만원을 받았고, 2021~22시즌 1부 투어 승격에 성공했다. 예민한 공을 잘 다루고 꼼꼼하게 치는 그의 스타일이 서서히 통하기 시작했다.

박정근은 요즘 파주시 금촌동의 가브리엘 스포츠 당구 클럽에서 일하며 레슨도 하고 있다. 박정근은 “코로나로 인해 오후 9시면 당구장 문을 닫아야 해서 당구계도 힘들다. 그래도 ‘퍼펙트 큐’를 달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시는 손님이 늘었다”고 했다. 그는 설 연휴(26~2월2일)에 고양에서 열리는 웰컴저축은행 웰뱅 PBA 챔피언십에 출전할 예정이다.

박정근은 “아파트 보증금이 모자라 월세를 내고 있는데 퍼펙트 큐 상금을 보증금에 보태려 한다. 아직 소속팀이 없는데 앞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생겼으면 좋겠다. 기계처럼 완벽한 ‘세계 챔피언’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과도 붙어보고 싶다. 언젠가 우승도 하고 싶다. 예쁜 당구장을 차려 운영하는 것도 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당구는 인생과 비슷한 것 같아요. 수많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죠. 실패하면 상대에게 기회가 넘어갑니다. 하지만 당점, 스트로크 속도, 공의 두께, 힘, 거리를 잘 조절하다 보면 결국 성공할 수 있어요. 저처럼 무명선수도 ‘퍼펙트 큐’를 달성했듯이.”


▶박정근은...

출생: 1975년생(47세)

직업: 정수기 판매→치킨집 사장→배달 아르바이트→프로당구 선수

소속팀: 없음(파주 가브리엘 당구클럽서 레슨 중)

드림투어(2부): 2019년 데뷔, 2020~21 6차대회 우승

올 시즌: 2021년 1부 데뷔, 최고 성적 NH농협카드 대회 16강(16강서 퍼펙트큐 달성), 포인트 랭킹 27위

스타일: 예민한 공 잘 다루고, 꼼꼼하게 쳐

■ 프로당구 상금 1억원, 인터넷 시청자 4만명


2019년 한국에서 출범한 PBA(Professional Billiards Association)는 세계 최초의 프로당구 투어다. 2021~22시즌은 3번째 시즌이다. 남자부는 1부(PBA 투어, 등록 121명), 2부(드림 투어, 180명), 3부(챌린지 투어, 397명)로 운영 중이며, 별도로 여자부 LPBA(등록 121명)도 있다.

PBA 1부 기준으로 연간 7개 투어를 진행한다. 매 투어 128명이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린다. 프로배구처럼 세트제다. 32강~4강은 5전3승제, 결승은 7전4승제다. 세트는 15점제, 마지막 세트만 11점이다. 수구를 큐로 쳐서 제1적구와 제2적구를 맞히는 동안 당구대 모서리인 쿠션에 3회 이상 닿아야 득점이다. 기본 1득점이고, 빈 쿠션을 이용한 뱅크샷은 2득점이다.

대회별 총상금은 2억5000만원, 우승상금은 1억원이다. ‘왕중왕전’인 파이널은 우승 상금이 3억원(총상금 4억원)이다. 2020년부터는 팀 리그가 창설됐고, 현재 NH농협카드, 신한금융투자, SK렌터카, 크라운해태 등 8팀이 있다. 혼합복식 등으로 6세트를 진행해 승점 3점을 얻는 방식이다.

세계 최강 중 한 명인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은 PBA에서 4차례 우승했고, ‘헐크’ 강동궁도 PBA에서 활약 중이다. LPBA에는 ‘당구 여제’ 김가영, ‘일본 3쿠션 전설’ 히다 오리에 등이 몸담고 있다.

MBC스포츠플러스 등 TV 4곳, 네이버 등 인터넷 4곳에서 중계한다. 쿠드롱과 조재호의 맞대결은 인터넷 최고 시청자 수는 4만명을 넘었고, 스롱 피바이와 오수정의 맞대결을 지켜본 이도 3만명 이상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프로당구가 맞느냐’는 논란도 있다. 세계캐롬연맹(UMB)과 대한당구연맹(KBF)은 2019년 선수 수급을 두고 PBA와 마찰을 빚었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 최성원, 월드컵 3회 우승자 김행직 등은 KBF에 잔류했다. 반면 지난해 조재호, ‘캄보디아댁’ 스롱 피아비 등이 PBA로 전향했다. PBA와 KBF는 2020년 자유로운 출전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지만 결국 결렬됐다.

박린 기자

파주=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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