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호텔 밖 해고노동자 펼침막이 '쾌적한 객실 제공' 방해?

신민정 2022. 1. 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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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 반발 로비 농성 세종호텔 노동자에
100m 안 '단결투쟁' 펼침막도 못 걸게 한 법원
세종호텔이 직장폐쇄를 하겠다고 밝힌 지난달 9일, 한 노동자가 서울 명동에 있는 세종호텔 로비에서 ‘파업 트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세종호텔은 정리해고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조리·식기세척 노동자한테까지 외국어 시험을 요구해 논란을 빚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정리해고에 불복해 직장점거 시위를 벌여온 세종호텔 노동자들에게 법원이 “점거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호텔 100m 안에서는 펼침막이나 팻말을 거는 행위도 금지했다. 노동자들은 “해고노동자가 자신의 사업장에서 싸울 수 없다면 어디서 싸우라는 말이냐”며 반발했다.

18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재판장 송경근)는 서울 중구 세종호텔의 운영사 세종투자개발이 노조와 조합원을 상대로 낸 업무방해금지 등 가처분 사건에서 지난 12일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건물을 점거하거나 호텔 반경 100m 안에서 경영진 규탄 취지의 내용이 담긴 피켓, 현수막을 거치해선 안 된다. 이를 위반할 경우 위반행위 1회당 1백만원을 회사에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지난해 11월 세종호텔 쪽은 15명을 정리해고한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그해 12월2일부터 직장점거에 들어갔다. 해고된 15명 중에는 28년째 객실 청소를 해온 직원, 22년째 이 호텔에서 근무하다 육아휴직에 들어간 직원 등이 포함됐다. 노조는 “회사가 자산매각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구조조정부터 하려 한다”며 호텔 로비 일부 공간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일주일 뒤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섰다. 그리고 법원에 노조 퇴거 가처분 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노조의 직장점거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정리해고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코로나19 사태로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함에 따라 호텔이 극심한 경영난을 겪게 됐다. 이 과정에서 유휴인력이 발생해 인력 감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정리해고에는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었다”고 봤다. 이에 따라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조 쟁의행위는 정당하지 않고, 회사가 단행한 직장폐쇄 역시 적법한 조처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직장폐쇄 기간 중 호텔 경계 100m 이내에서 경영진을 비난하는 취지의 펼침막을 걸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회사 쪽 요구까지 받아들였다. 노조는 ‘무능한 경영 결과를 노동자에게 떠넘기지 말라’ ‘노동자 단결투쟁, 우리는 승리한다’ 등의 펼침막을 호텔 인근에 걸었는데, 재판부는 이조차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재판부는 “노조 행위는 고객에게 편안하고 쾌적한 객실을 제공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4성급 관광호텔의 정상적 업무수행을 현저히 곤란하게 했다. 노조의 행위는 사회적 타당성을 결여한 것일 뿐 아니라 집회·시위의 자유를 넘는 행위로 업무방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호텔 건물 밖에 내건 펼침막이 “편안하고 쾌적한 객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반면 노조가 ‘회사의 직장폐쇄를 풀어달라’며 신청한 가처분 사건에서 같은 재판부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본안소송에서 면밀한 증거조사와 심리로 직장폐쇄의 위법성 여부를 가려야 한다”며 노조의 요청을 기각했다.

노조 쪽은 ‘형평성을 잃은 판결’이라고 했다. 조세화 서비스연맹 법률원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 사건과 유사한 2017년 병원 로비 점거 쟁의 관련 형사사건에서 ‘로비는 점거형태의 쟁의행위가 금지되는 장소로 볼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 회사가 신청한 가처분은 단정적으로 판단했는데, 노조의 가처분은 본안소송에서 심리가 필요하다며 신중하게 판단한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이 호텔에서 조리사로 일한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세종호텔지부장은 “코로나 위기로 인한 손실을 온전히 노동자가 떠안고 거리로 내몰리게 됐다. 이번 판결은 해고노동자의 정당한 항변을 불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해고노동자가 자신의 사업장에서 싸울 수 없다면 어디서 싸우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노조는 호텔 밖 농성을 이어가는 한편, 법원 가처분 결정에 불복해 항고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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