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면에 금만 가도 터널 막아라?" 정부 지침에 '멘붕'된 공공기관들

하수정 2022. 1. 1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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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공공기관에서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한 임직원 화상회의가 열렸다. 정부가 지난달 말 배포한 '중대시민재해 해설서'를 숙지하기 위한 회의다. 회의는 곧 정부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했다. 회의에 참석한 한 임원은 "정부 가이드라인이 나오면 법에서 헷갈리는 부분이 명확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혼선이 왔다"며 "연초부터 잇따라 대형사고가 터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지침으로는 안전에 구멍이 뚫리는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토로했다. 

오는 27일 시행을 앞둔 중대재해처벌법의 주요 축인 시민재해와 관련, 지금이라도 제도 보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대시민재해는 산업재해와 달리 참고할 판례가 없고 범위가 훨씬 넓은데도 불구하고, 법과 시행령, 정부 가이드라인까지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는 분석이다. 

 ○공공부문 사업장 수 파악도 안돼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방 공공 부문에서 27일부터 중대재해법을 적용받는 곳은 지방자치단체 243곳과 지방공공기관 460곳(39%)이다. 지방공공기관 1177곳 중 490곳은 상시근로자 50인 미만으로 법 시행일로부터 2년 유예를 받았다. 각 기관의 사업장 별로도 시행시기가 다르다. 공사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은 2024년 1월부터 법이 적용된다.

하지만 정부에선 공공부분의 중대재해법 적용 사업장 수 조차 아직 취합하지 못한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각 중앙부처와 지자체, 공공기관별로 법 적용을 받는 사업장 현황을 파악 중"이라며 "워낙 범위가 넓다보니 법 적용대상을 취합하는 데 시간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공부문에서 법 적용 사업장을 가리는 것 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것은 법이 과도하게 빠른 속도로 추진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논의할 새도 없이 1년만에 법과 시행령을 만들고 정부 가이드라인은 불과 법 시행 한달 전에 내놓는 것은 졸속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공공부문에서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중대시민재해의 경우 중대산업재해보다 법적 불확실성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산업재해는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판례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지만 시민재해의 경우 새로운 개념인데도 정부는 모호한 지침을 내놓고 있다"며 "이렇게 혼선이 많은 채로 법이 시행된 이후를 생각하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책임자’ 법적 해석 논란

중대재해처벌법상 공공부문에서 가장 혼선이 많은 부분은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다. 정부부처 장관-지방자치단체장-지방공공기관장-도급·용역·위탁사업자로 이어진 수직관계에서 사고 발생시 책임의 주체와 안전 조치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는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이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갖는다"고 명시돼있다. 이 대목에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의 범위와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의 의미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는데도 정부 가이드라인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경영책임자 등', '실질적' 과 같이 모호한 단어가 한 문장에 두번이나 나온다"며 "정부에선 무조건 대상을 포괄적으로 확대하는 쪽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로펌에 문의하면 대답이 모두 다르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중대재해법이 형사처벌에 근거한 것이니 만큼 최대한 엄격하게 대상을 제한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정부 해설서는 그 반대로 포괄적인 해석이 많다. 

정 교수는 "형법이 수반된 규정은 엄격하게 해석해 의무 주체를 명확히 특정해야하는 데도 정부는 넓게 해석을 해놓아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예컨데 서울시가 소유하고 서울시축구협회가 운영하는 효창운동장의 경우 하청을 준 환경미화사업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면, 지금 법으로는 서울시장부터 하청업체의 장 중 누가 책임이고 누가 안전예방주체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이로인해 기관장들이 도급·용역·위탁에 대한 안전관리를 오히려 회피하는 결과도 나타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법이 모호한 상태에서는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주체'가 되지 않기 위해 위탁 사업장에 대해 최대한 관여하지 않으려는 반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우후죽순 지정된 공중이용시설

공중이용시설, 공중교통수단 등 중대시민재해 적용대상이 충분한 논의없이 지정돼 안전 사각지대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많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중대시민재해가 적용되는 공중이용시설 대상에 교량도로와 터널도로는 포함되지만 일반도로는 해당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도로안전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포트홀(도로패임)'이 일반도로에 있으면 중대시민재해에 해당이 안 되고 다리나 터널에서 있으면 해당된다. 서울시설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자동차전용도로에서 발생한 포트홀은 일반토공도로 4462건, 교량 406건, 터널 11건으로 일반도로가 압도적으로 많다.

또 중대시민재해가 적용되는 공중교통수단에 철도는 들어가지만 안전사고의 주요 원인인 철도의 선로는 빠져있다. 시외버스는 해당되는 반면 광역버스와 시내버스, 마을버스는  해당되지 않는 점도 안전에 구멍이 생길 수 있는 부분으로 꼽힌다. 

중대시민재해 적용대상을 둘러싼 현장의 혼란은 정부 가이드라인이 한층 더 부추기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달 말 법 시행 한 달도 안남기고 배포한 중대시민재해 해설서에 따르면 "터널 노면 포장의 균열 신고접수시 긴급 안전검검, 보수보강, 이용제한 조치 등의 업무를 취하라"고 명기돼 있다.

국토부 가이드라인을 공부하기 위해 직원 회의를 진행했던 한 공공기관에선 이에 대해 “포장 균열(금이 간 것)까지 이용제한을 하면 전국 터널을 모두 폐쇄하란 말이냐", "도로에 씽크홀이 발생해 시민 생명이 위협받아도 터널 노면 떼우러 달려가야하나"는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공공기관 관계자는 "통상 도로시설물의 경우 선형균열→거북등균열→포트홀로 심화되고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땅꺼짐(싱크홀)인데, 초기단계인 균열부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것은 현장을 전혀 모르고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현장에선 안전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제도를 재정비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조성일 서울시설공단 이사장은 "부실하게 만들어진 중대재해처벌법의 부작용때문에 오히려 안전이 뒷전으로 밀리는 일이 생길까 우려된다"며 "지금이라도 충분한 재논의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빨리빨리'가 부실과 사고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해결책조차 졸속으로 밀어부쳐 민·관 할 것없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익현 율촌 변호사는 "시민재해의 범위가 다양하고 넓기때문에 각 분야별 해석을 통해 지침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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