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라고 해서 희망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기자 2022. 1. 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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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합니다 - 노숙자의 ‘세밑 희망가’

체감온도 영하 20도 세밑의 밤, 시멘트 바닥에 뉜 몸은 육중한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새벽 가락시장 동태가 됩니다. 토막과 토막 사이에서 빠져나온 주린 영혼은, 작별의 하얀 속살을 더듬고 끊어진 신경은, 급물살 휘돌던 노련한 유영은 도시를 떠도는 유령이 됩니다. 다리 밑에 매달린 고드름이 짤그랑거립니다. 초저녁부터 내린 눈은 발등을 덮고, 추워 떨지 못한 어둠이 온기를 찾아 아스팔트 끝자락에 매달립니다.

길 건너 35층 아파트에 잠옷 차림의 한 남자가 금빛 커튼을 열고 눈 내린 창밖을 바라보며 허리를 구부리고 스키 타는 시늉을 합니다. 아마도 내일 스키장을 가려나 봅니다. 그에게 눈은 따뜻하고 즐거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남자가 커튼을 닫자 화려한 불빛이 하나둘 꺼져갑니다. 덩달아 나도 찬 바람을 말아 베고 눈을 감아봅니다. 눈은 좀처럼 그치지 않습니다. 밤새 내리는 눈꽃화음에 귀를 열어둡니다. 귀로 쌓이는 눈은 배고픔도 서러움도 없는 설원입니다.

오늘따라 시멘트 바닥이 더 찹니다. 라면박스 위에 홑이불을 깔았으나 그래도 냉기는 맹렬하게 솟구쳐 오릅니다. “견딜 만한가? 어째 몸이여!” 답이 없습니다. 무릎이 턱에 닿도록 웅크려봅니다. 어금니에서 쇳소리가 납니다. 갈비뼈 사이로 전기톱이 깊숙이 들어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동침을 노리던 찬 바람이 파고듭니다. 사타구니로 파고든 손이 견디다 못해 콘크리트 바닥을 사정없이 내칩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어디서 술을 얻어먹었는지 윗자리 박 씨는 잠깐잠깐 코를 곱니다.

코로나19로 식당을 두 번이나 엎어 먹었다는 박 씨, 결국 이혼하고 낙엽처럼 홀몸으로 나뒹구는 저 박 씨, 그래도 아직 8만 원이 있다며 쓴웃음 짓던 그는 얼굴빛이 가을 은행잎처럼 노랗게 물들어 갑니다. 보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랫자리 송 씨처럼 머잖아 검은 비닐봉지와 거꾸로 쓰러진 소주병이 상주 노릇을 할 것입니다. 자고 나면 한두 명씩 들것에 실려 나가는 노숙의 수채화는 오늘도 빛바랜 한 줌의 눈물을 던져주고 떠납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소리 내어 울지 않습니다. 순서만 다를 뿐, 어차피 모두는 그 길이 내 길임을 알기에 그저 “박 씨 갔네”라며 보따리 든 난민처럼 줄지어 햇빛 찾아 떠나면 그만입니다. 미래 없는 노숙은 서럽습니다. 흔히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합니다. 그것은 배부른 이승일 때의 얘기입니다. 차디찬 컵라면 국물로 아침을 건너는 천한 이승은 개똥밭도 아닌 살아 있는 저승입니다. 나도 한때는 바쁜 출근길에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녔습니다. 남처럼 회식도 하고 여행도 했습니다. 육십이 허전하게 다가올 무렵 한몫 잡자는 과한 욕심으로 산 비트코인은 큰 아가리를 벌리고 나 같은 바보들을 무지막지하게 씹어 삼켜버렸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후회는 이미 늦었습니다. 삐비꽃 언덕에서 사랑을 고백하며 보드라운 손등에 입 맞추던 추억이 그립습니다.

세밑 추위엔 가끔 고마운 손길도 있습니다. 누군가 놓고 간 노란 보자기 속에 깨끗한 패딩과 포일로 싼 케이크 두 조각, 생수 한 병 그리고 현금 10만 원이 들어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 온정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나는 남을 위해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은 이 패딩을 이불처럼 입고 아파트 사내보다 더 포근한 잠을 잡니다. 비록 스키장은 못 가지만 꿈속의 설원은 모두 내 희망의 스키장이 됩니다. 노숙자라고 해서 희망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노숙자라고 해서 기도의 슬픔까지 노숙은 아닙니다. 내게도 내일은 금줄 친 바람이 불 것입니다.

김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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