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내비게이션] 강남 개발과 젊음의 초상..'제3 한강교'

이승우 2022. 1. 18. 08: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70s 아이돌' 혜은이의 대표곡

[※ 편집자 주 = 대중가요는 당대의 시대상, 풍속, 문화를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노랫말에 담긴 장소와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그 시절 애틋한 감성과 추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아~ 옛날이여.]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1970년대 후반은 세계적으로 디스코 열풍이 불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본격적으로 일어서기 시작한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영동'이라 불렸던 강남 개발 바람과 맞물려 디스코 붐이 거리를 휩쓸었다.

1985년 7월 남산에서 내려다본 한남대교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1979년 젊은이들의 사랑과 야망

당대 최고 여가수였던 혜은이와 그의 멘토 길옥윤은 이런 시류를 놓치지 않았다. 신나는 디스코 리듬에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을 실어낸 '제3 한강교'라는 노래를 1979년 1월 발표해 선풍을 일으켰다. 혜은이는 이 노래로 그해 각종 가수상을 휩쓸었고 동명의 영화도 제작됐다. 당연히 영화 주연은 혜은이였고 이 노래는 주제가로 실렸다.

당시 어른부터 아이까지 흥얼거렸던 이 유행가의 가사는 한 편의 서정시 같다. 시적인 노랫말을 최신 리듬에 실어 인기 정상의 디바가 불렀으니 히트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할 정도였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인생도 덧없이 흘러가는구나" 하는 애잔한 감상에 빠지다가도,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둘만의 사랑을 맹세한 젊은이들이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가려는 모습에선 허무함 대신 희망을 가슴에 채운 젊음의 열정이 전해진다.

1977년 전성기 시절 가수 혜은이 [배정환=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경부고속도로, 강남, 그리고 '제3 한강교'

'제3 한강교'는 무엇보다 당시 시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역사책 같은 노래라는 점에서 가요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재 한남대교로 불리는 제3 한강교는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견인차였던 경부고속도로의 하행선 진입 관문이면서 '부와 욕망의 상징'인 강남 신도시 개발에 디딤돌이 됐다. 1969년 12월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개통됐고 1984년 한남대교로 개칭됐다.

애초 건설 목적은 유사시 도강용 다리였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서울 도심과 강북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강을 못 건너 남쪽으로 피란하지 못했던 비극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군사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경부고속도로와 제3 한강교의 건설은 사람과 재화의 이동을 혁신적으로 빠르고 쉽게 만들어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사람들은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시작했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했다.

1970년 12월 영동신시가지 개발 현장 [서울시 제공. 재배포 DB 금지]

이 노래의 화자도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이런 설렘과 욕망을 드러낸다. 압구정 배밭을 갈아엎어 건물이 들어서고 초가집들 대신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지어지는 광경에서 사람들은 "그래도 앞으론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개발의 명암은 존재했지만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저개발 후진국에서 소득과 생활 환경이 계속 향상되는 전례 없던 경험은 사람들을 활기차게 만들었다.

고소득 국가에서 유소년기를 풍요롭게 보냈으나 성장 정체와 일자리 감소 등으로 인해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는 지금 젊은이들과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제2 한강교'였던 양화대교를 제목으로 한 요즘 노래는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자아낸다. 2014년 Zion.T가 발표했던 소울풍의 곡 '양화대교' 말이다.

1969년 제3 한강교 상부 구조물 공사가 한창이다. [서울시 제공. 재배포 DB 금지]

제3 한강교의 가사가 정부 당국의 검열로 수정됐던 일도 요즘 유행하는 젊은이들 말로 '웃픈'(웃기면서 슬프다는 의미의 속어) 사건이었다.

혜은이가 이 노래를 처음 발표할 때 가사 일부에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 둘은 하나가 되었답니다'라는 대목이 포함된 게 문제였다. 당시 가요와 공연 등을 심의하는 기구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개사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저 가사가 왜 퇴폐적인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가사 원문은 결국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 둘은 맹세를 하였습니다'로 바뀌었다.

1969년 12월 개통된 제3 한강교 [여문책 제공. 재배포 DB 금지]

'원조 아이돌' 혜은이, 한국을 넘어 아시아로

당시 국내는 물론 동남아와 일본 등에서도 인기를 누렸던 혜은이에 얽힌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당대를 살았던 국민들의 기억 속에 '원조 국민 여동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스타나 인기 연예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기억을 형성하는 문화 아이콘으로서 그는 한국인 정서의 일부를 차지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불어온 고고와 디스코 바람 속에서 기존 트로트 가수 대신 신선한 얼굴을 원했던 가요계는 혜은이란 샛별을 찾아냈다. 인기 작곡가이자 색소포니스트인 길옥윤은 혜은이를 발굴해 자신의 작품집 형태로 혜은이의 독집을 잇달아 발표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혜은이는 1975년 데뷔곡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필두로 '진짜 진짜 좋아해', '당신만을 사랑해', '감수광', '새벽비', '뛰뛰빵빵', '독백', '열정', '파란 나라'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혜은이는 또 '원조 아이돌'이자 '한류 스타'였다. 1977년 일본 야마하가요제에서 주목받자 일본에서 곡을 발표했는데, 당시 일본 언론은 그를 '간코쿠노 아이도루'(한국의 아이돌)로 소개했다. 이듬해 뉴질랜드에서 열린 태평양국제가요제에서 수상한 뒤엔 동남아시아 국가를 순회 공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가수 혜은이 [예랑엔터테인먼트 제공. 재배포 DB 금지]

욕망의 열차는 다리를 건너 어디로 갈까

혜은이가 노래했던 '제3 한강교'는 지금도 '욕망의 도시' 강남을 바라보며 변함없이 서 있다. 그리고 강물은 예전처럼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간다. 강북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학군과 일자리, 부를 안겨줄 투자처, 나만의 품격을 보장해줄 주거지 등을 찾아 수십 년간 한강을 건넜다.

세월이 흘러 이제 강남 아파트는 그 어렵다는 로또에 당첨돼도 쉽게 살 수 없는 희소품이 됐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물에 묻고 싶어졌다.

"우리의 행복은 '제3 한강교' 남쪽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걸까?"

제3 한강교로 불렸던 한남대교 전경 [전재원=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제3한강교

강물은 흘러 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 둘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leslie@yna.co.kr

☞ 70대 간호사·노숙자 이유 없는 공격으로 숨져
☞ 경주서 루지 타던 7세 여아 가드레일과 충돌 숨져
☞ "안네 프랑크 밀고자는 유대인…아버지가 알고도 덮었다"
☞ '안희정 성폭력 피해' 김지은 "김건희씨, 사과해야"
☞ 도핑 자격정지 쑨양, '라방'서 화장품 94억원어치 판매
☞ "비자 발급해달라" 유승준 두 번째 소송 다음 달 결론
☞ 굴찜 먹다 발견한 커다란 진주…"행운의 징조 되길"
☞ 조국 딸 조민, 경상국립대학교병원 전공의 면접 봤다
☞ '사내 성폭력 파문' 블리자드, 연루 직원 30명 해고·40명 징계
☞ '신태용을 구하라' 인니 축구팬들, 온라인 캠페인 나선 까닭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