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학교장 재량'이라니..학생인권은 어디에?

이유진 2022. 1. 1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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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교육법상 학칙 제·개정 '학교장 권한'
학내 의견수렴 한다지만 학생 의견 무시 일쑤
"기본권 침해" 인권위 권고 불구 1년째 뭉개기도
교육청·교육부 뒷짐에 "법으로 금지해야" 목소리
한파가 기승을 부린 2017년 12월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고당길에서 여고생들이 롱패딩을 입고 등교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광역시의 한 사립 중학교 학생들은 최근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가는데도 종아리까지 덮는 롱패딩을 입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학칙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롱패딩은 지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또 다른 공립 직업계고에서는 머리카락 염색·파마는 물론 똥머리, 집게핀·고데기 사용까지 금지하고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와 부산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지난해 제보받은 학생인권 침해 사례 75건 가운데 일부다. 이들은 제보 내용을 추려 부산 시내 중·고교 25곳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 등을 침해하고 있다며 지난해 10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진정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해당 학교들의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앞서 인권위 권고를 받고도 1년 이상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학교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전 한밭고는 2020년 12월21일 인권위로부터 “염색과 파마, 비대칭, 무스 등 인위적인 변형을 하지 않도록 하고 남학생의 경우 길이에 제한을 둔 두발 규정은 학생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권 및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고 헌법과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두발 규정 개정을 권고받았다. 지난해 한밭고에서는 총 7차례의 학교운영위원회가 열렸지만 인권위 권고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던 3학년 김난웅(19) 학생이 지난해 12월14일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자 12월 말 부랴부랴 학생생활규정 제개정위원회를 열었다. 위원회에는 학생 3명, 학부모 3명, 교사 5명 등 총 11명이 참여해 두발 길이 규제를 풀고 과하지 않는 파마까지는 허용하되 염색은 그대로 금지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달 8일 열리는 학운위까지 통과하면 새 학생생활규정은 3월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대구 영남고 역시 2020년 6월 인권위로부터 두발 규제 개정 권고를 받았지만 1년이 넘도록 이행하지 않고 있다가 인권단체 시위와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최근에야 길이 규제를 없애기로 했다. 김난웅 학생은 17일 <한겨레>에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지 않았다면 과연 학교에서 학칙을 개정하려고 나섰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2021년 12월24일 대전 한밭고 교문 앞에서 김난웅 학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학교 쪽에 인권위 권고 이행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김난웅 학생 제공

학교가 이처럼 미적댈 수 있는 이유는 인권위 권고에 법적 강제력이 없는데다, 근본적으로 학칙 제·개정 권한이 현행 초·중등교육법 제8조에 따라 학교장에게 있기 때문이다. 시행령 제9조는 제·개정에 앞서 학교장이 미리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학내 의견 수렴 과정에서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다. 대전 한밭고 사례가 대표적이다. 김난웅 학생이 2020년 4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자 학교는 같은 해 9월 한 차례 두발 규정을 손봤다. 당시 학생 설문조사 결과 80%가 ‘두발 규제에 반대한다’고 의견이 나왔지만 학교는 “학생, 학부모. 교사 의견까지 모두 수렴한 결과 두발 길이 제한을 없애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라는 이유로 들어 남학생 앞머리 길이를 ‘눈썹 선까지’ 제한하던 것을 ‘눈썹을 완전히 덮지 않는 정도’로 고치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형식적 측면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했을 뿐이지 내용적 측면에서는 실질적 정당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고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아수나로 서울지부 치이즈 활동가는 “학내 민주적인 의사 수렴 과정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보니 두발·복장을 자유롭게 하면 성적이 낮아진다든지, 비행 청소년이 된다든지 하는 부모와 교사 세대의 편견이 학교 현장에서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역에서조차 과도한 두발·복장 규제로 인권위 권고를 받는 학교들이 무더기로 나왔다는 점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서울·경기·광주·전북·충남·제주 등 6곳에만 있다. 2012년 제정된 서울학생인권조례 제12조는 ‘학교장 및 교직원은 학생의 의사에 반하여 복장, 두발 등 용모에 대해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교육청은 2018년 ‘두발 자유화 선언’을 하고 관내 학교에 두발 길이뿐 아니라 염색·파마 등 두발 상태에도 제한을 두지 않을 것을 적극 권유한 바 있다. 2019년에는 학생들의 의견을 50% 이상 반영해 어떤 교복을 입을지 결정하는 ‘교복 공론화’ 제도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울 시내 중·고교 31곳이 지난해 11월 인권위로부터 학칙 개정을 권고받았다. 이 학교들 가운데는 똥머리·투블럭 같은 특정 머리 모양을 금지하는 곳, 염주와 묵주 같은 종교적 장신구 착용마저 금지하는 곳, 교복을 재킷까지 모두 착용해야만 방한용 외투를 입을 수 있도록 제한하는 곳도 있었다. 학교 쪽에서는 인권위에 “두발 규제를 풀면 유해한 환경에 접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학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는데 인권위는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어 납득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한겨레>에 “31곳 학교별 학칙 개정 여부를 상반기 안에 지도·점검할 예정”이라면서도 “학교장이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교육청이 개정을 강제하기는 어렵고 계속해서 권고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현 활동가는 지난 12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생인권 현실과 학생인권 보장 법제도의 필요성’ 토론회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지역에서조차 학생인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고 보기 어려운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교육청에서는 학생인권 정책을 선언적으로 발표하고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인권 문제가 학교 재량에 상당 부분 맡겨져 있는 법체계”라고 지적했다.

학생인권조례도, 교육당국도 ‘학교 자율’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예 법으로 두발·복장 규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박주민 의원이 지난해 11월 대표발의한 ‘학생인권법’(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학교에서 할 수 없는 ‘학생인권 침해행위’ 가운데 하나로 학생의 두발·복장을 검사하는 등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넣었다. 공현 활동가는“학생인권법 제정은 학교가 학생인권에 관해 지켜야 할 ‘선’을 정하고 그 ‘선’을 넘었을 때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라며 제정을 촉구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생인권 보호 및 학칙 제·개정사업은 2015년 시·도교육청으로 이관됐고 학칙은 학교가 자율적으로 제·개정하는 것”이라면서도 “올해부터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학칙 전수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인권위 권고를 반영한 학칙 매뉴얼을 제작해 올해 안에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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