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백성 구해낸 정치인이 찾은 나무
[경향신문]
마흔다섯 살의 사내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 사람살이를 보살필 사명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한 건 500년쯤 전이다. 재임 내내 백성의 삶을 평안하게 지키기 위해 헌신한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말 채찍조차 남기고 떠난 청렴한 삶을 실천한 그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청백리의 본보기로 기록돼 있다.
제주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약동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한라산신제였다. 한라산신의 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제주 사람들은 음력 정월이면 제수용품을 이고 진 채 백록담에 올라 제를 올렸다. 그러나 사나운 날씨를 무릅쓰고 산길을 오르면서 사람들은 지쳐 쓰러지고, 일쑤 목숨을 잃었다.
이약동은 사람의 평안이 훼손당하는 현실을 바로잡겠다고 궁리했다. 그는 사람살이를 골고루 살피는 산신이라면 필경 사람의 마을에 내려오리라고 생각했다. 산신이 머무를 만한 터를 찾아 제주 곳곳을 헤집고 다닌 건 그래서였다. 긴 탐색 끝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지금의 ‘제주 산천단 곰솔 숲’의 큰 나무들이었다. 이약동은 이곳에서 산신제를 올리기로 하고, 제단을 차린 뒤 ‘산천단’이라 이름했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부임한 첫해, 조선 성종 원년인 1470년의 일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백록담까지 오르는 무모한 산행을 하지 않아도 됐다. 산천단은 이약동 목사가 제주 백성을 위해 베푼 여러 선정(善政)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자취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제주 산천단 곰솔 숲’은 8그루의 곰솔로 이루어졌다. 곰솔과 더불어 팽나무, 예덕나무, 머귀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의 정경은 싱그럽다. 8그루의 곰솔 가운데 가장 큰 나무는 높이가 무려 30m나 되고,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도 4m가 넘어 우리나라의 모든 곰솔을 통틀어 가장 큰 나무에 속한다. 다른 7그루의 곰솔 또한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다.
숲 한편에는 이약동 목사의 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가 남아, 훌륭한 정치인의 자취를 기억하게 한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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