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번아웃, '나'를 재배치하는 시간

2022. 1. 1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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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둘 수 없는 일에 무기력
정신뿐 아닌 상황 변화 필요
스스로 위치 다시 재정립하고
힘들면 주변에 도움 청해야

마흔 살 이후로 번아웃(burnout syndrome·소진증)이 온 적이 없다. 반대로 말하면, 마흔 살 이전엔 번아웃 무기력에 빠져 살았다. 그 경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풀어내려 한다.

번아웃은 열심히 일한다 해서 무조건 생기는 증상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번아웃이 없는 사람도 있다. 원래 번아웃에 내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일에 열정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일에 자신을 투입하고 스스로를 착취하면 번아웃이 온다. 그러니까 번아웃은 자기소외 때문에 온다. 내가 나를 소외시키고, 나와의 소통을 끊어버리면 번아웃이 되는 것이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작가
어떤 일을 하기 싫은 이유는 그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일의 가치를 인지하면 ‘나’는 ‘나’로서 그 일을 하게 된다. 가치는 무조건 주어지지는 않는다. 누가 봐도 가치 있는 일도 있지만 가치를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을 해야만 할 때는 가치 탐색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좀 억지스럽지만 자기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가치 탐색 과정에서 몰랐던 가치를 깨닫게 되는 수도 있다.

문제는 번아웃을 왜 그렇게 회피하는가 하는 점이다. 번아웃 자가진단을 내렸다 가정해 보자. 여기서 질문. 번아웃을 치료한다면 어떤 상태가 되기를 원하는가. 번아웃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여전히 하기 싫은 일, 가치 없는 일을 열심히 하는 상태가 되고 싶은가. 아무런 저항 없이 일들을 척척 처리해내는 자기 자신을 기대하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번아웃이 치료되면 ‘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바뀌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서 번아웃은 단지 정신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외적 상황의 문제인 것이다.

번아웃은 나의 정신상태를 교정해야 하는 치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상황을 직시해야 하는 인식과 통찰의 문제다. 번아웃이 오기 전, 어떤 세상 속에 있었는가.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말한 대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세계에 살았을 것이다. 그 욕망이 만드는 환상이 너무 유혹적이라 회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 소비하게 됐을 것이다. ‘노력하면 된다’는 자기긍정이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시적인 자기소외는 미래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다가 무너졌을 것이다.

상황 자체를 바꾸기는 어렵다. ‘상황’이라는 것은 수많은 관계와 변수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혼자 힘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다. 그 상황 속에서 나의 위치를 다시 찾는 것이 차선책이다. 나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자신을 재배치하면 자신이 놓인 상황도 바뀌게 된다. 역할도 재조정된다. 이 과정은 지난하고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키며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나로부터 소외시키지 않기 위한 상처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상처 입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처를 입는 것이 삶의 기본값이라면 그 상처가 유의미한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일을 빨리빨리 처리했듯이, 번아웃도 빨리빨리 없애려 들면 안 된다. 번아웃은 내 삶에 당도한 질문이다. 그 질문은 시간을 들여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 내게는 마흔 살이 그런 시기였다.

최근에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연달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인문학 강의에서 중년의 남성으로부터, 또 한 번은 나의 학생 A로부터. 그 남성은 자신에게 번아웃이 왔었고 지금은 나아졌다고 말했지만 얼굴엔 여전히 긴장이 남아 있었다. 겨우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A는 몇 달 전 번아웃을 이야기했다. 줌(zoom) 수업이 끝나고 모든 학생이 나간 후에 검은 화면 위에 남아 있는 A는 마치 고립된 섬 같았다. 과한 감정이입 때문이었을까. 나는 머뭇거렸다. 선생으로서 빤한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위로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아웃의 시기를, 자신의 또 다른 면을, 혹은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시간으로 생각하자고 어설프게 마음을 나눴었다.

얼마 전 A가 교원임용고시 1차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용고시에 떨어지더라도 번아웃의 시기를 잘 겪어내리라 말하면서 엷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또 어느 날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노랗게 탈색하고 나타나 환하게 웃기도 했었다. 모두 번아웃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만약 번아웃이 없었다면 A는 여전히 너무 성실한 사람, 너무 최선을 다하는 사회인, 너무 책임감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책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A는 단순히 회복탄력성을 장전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면을 보는 힘, 세계를 직시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회복탄력성’이란 말도 재고돼야 하지 않을까. 회복이란 것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A는 감사하게도 내게 번아웃을 털어놓았다. 마흔의 내게도 말을 건넬 누군가가 있었다. 결국 번아웃도 증상을, 상처를 노출시킬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두 눈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가깝다고 생각한 적 없는 사람, 내 삶의 영역 바깥에 있었던 사람. “나는 나의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 번아웃이 주는 첫 번째 메시지인 것이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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