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듯 돌아온 박수근의 최대 작품

노형석 2022. 1. 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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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작품의 운명] 박수근 1964년작 '농악'

백내장·실명·간경화 이겨내며
리듬 발산하는 신명 그려낸 작품
초기 소장 때 표면 갈라졌지만..

아들-이우환-기업인 손 거치며
이국 땅에서 깔끔하게 보수 마쳐
이건희 수집 뒤 국립미술관 안착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3월13일까지) 전시장에 내걸린 박수근의 대작 <농악>. 세로 162㎝, 가로 97㎝로 박수근이 남긴 그림들 가운데 가장 큰 100호짜리 작품이다. 정적인 작가의 화풍과 달리 인물 도상의 역동성이 도드라지고 화강석 같은 표면 질감의 회화성이 강렬하게 묻어나오는 수작이다. 미술관 쪽은 작품 제작연대를 1960년대라고 표기했는데, 아들 박성남씨의 증언에 따르면 1964년 서울 전농동 작업실에서 작가가 병마와 싸우며 그린 역작이라고 한다. 노형석 기자

1964년께였다. 주위가 휑한 벌판이던 서울 동쪽 변두리 전농동의 외딴 2층 양옥집 마당에서 왼눈이 먼 쉰살 화가가 캔버스를 붙들고 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오른눈만 껌벅거리며 생애 가장 큰 대작을 완성하는 데 몰두했다.

몸은 만신창이었다. 간경화증으로 배에는 복수가 차올랐고, 수시로 복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악물고 온힘을 다해 몸을 곧추세우며 붓을 놀렸다. 사람 키만 한 100호짜리 캔버스 틀을 화실 안이 아니라 화실 바깥 출입문 앞 댓돌에 올려 문에 기대놓은 채로 그렸다. 좁은 화실 안으로 캔버스를 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고통과 싸우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땅의 이끼 낀 화강암 빛깔을 배경색으로 깔아야 해. 신명 나게 농악을 울리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율동과 소리를 귀가 아닌 눈으로 보여줘야지….’

의지는 강고하고 뜨거웠다. 하얗게 빛나는 백열 같은 열정으로 물감의 붓질을 수없이 겹치며 화강암의 암갈색 빛깔을 입혀갔다. 물감층으로 우둘투둘 두꺼워진 화폭에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평면적이고 단순한 형상으로 엇갈려 진군하는 듯한 농악대 군상의 일사불란한 율동이 소리의 파장처럼 퍼지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흥겹게 악기를 울리는 군상의 대열에 원근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붓질의 아스라한 흔적과 무채색에 가까운 색층의 울림만 남았다. 청력을 잃은 난관에 굴하지 않고 ‘합창’ 교향곡을 지었던 악성 베토벤처럼, 화가로서 치명적인 한쪽 눈 실명의 한계를 딛고 그리기의 끝없는 희열에 들떠 작업을 지속했던 예술가는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이듬해 5월 전농동 그 집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이름은 바로 ‘국민 화가’ 박수근(1914~1965)이다.

지난해 7월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기증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이 시작됐을 때 박수근의 아들 성남(76)씨는 누구보다도 감격해 하며 아버지가 남긴 대작 <농악>이 국가기관 소장품으로 내걸린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실명하고 간경화증으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속에 살았지만, 끝내 불굴의 의지로 세로 162㎝, 가로 97㎝의 대작을 그린 부친의 분투 현장을 성남씨는 고교생 시절 집 마당 귀퉁이에서 지켜봤던 터였다. 그는 말했다.

“48년 전 제 품에서 떠나보낼 때와 달리 그림의 상태가 너무 좋고 깨끗해서 기뻤지요. 마주 보고 선 순간 연어의 회귀가 떠올랐습니다. 대양에서 오랜 방랑을 끝내고 귀소 본능에 끌려 고향 산천에 돌아오면서 제대로 숨쉬기 시작한 연어의 모습 말이죠. 병마에 시달렸던 아버지가 다시 건강해져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었고요.”

1965년 봄 서울 전농동 자택 작업실에서 찍은 말년의 박수근. 별세하기 두달 전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 제공

<농악>은 박수근의 화력에서 매우 이례적인 작품이다. 그는 대부분 손바닥만 한 소품들을 남겼고, 전후 서민촌의 사람들과 동네, 자연의 정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이런 특유의 화풍에 견줘 악기를 울리는 인물 군상이 상하 엇갈리는 대열로 움직이며 리듬감을 발산하는 <농악>의 시청각적 이미지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출하다. 한쪽 눈을 실명한 탓에 형상성을 핍진하게 묘사하기 어려웠던 난점을 작가는 더욱 강렬해진 화강암질 마티에르(질감)의 표현과, 가까이에선 잔선만이 화강암질 화면에 물결치고 멀리서 봐야 아련하게 인물 형상이 드러나는 선묘의 기량으로 극복했다. 회화성이 더욱 무르익은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그림이 국립미술관에 내걸린 것을 보고 대양을 방랑했던 연어의 귀환이라고 한 성남씨의 말은 적확해 보인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면, <농악>의 산실이 된 전농동 2층 양옥을 지은 과정부터 녹록지 않았다. 애초 박수근은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서울 창신동 한옥에서 가족과 살면서 마루를 작업실 삼아 숱한 명작들을 그렸다. 하지만 도로 개설로 집이 두 쪽 나면서 헐값에 팔아야 했다. 이미 과음과 과로로 간경화증과 백내장을 앓던 박수근은 작품을 간간이 사주었던 컬렉터이자 로비스트 사업가였던 박동선(1970년대 코리아게이트 주역이 된 인물)을 만나 “몸이 많이 아프니 치료비를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성남씨는 비화를 공개하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박동선 선생을 최근 만났는데, 그때 부친의 도움 요청을 받고 당시 거액인 20만원을 바로 내줬다고 하더군요. 박 선생이 부친에게 준 지원금이 치료비뿐 아니라 전농동 집을 짓는 종잣돈으로 쓰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뒤 아버지가 감사 표시로 그림 소품 40여점을 리어카에 싣고 직접 끌어 서울 남산의 박 선생 사무실로 가져갔다고 해요. 박 선생은 받은 소품들을 친구들에게 나눠줬다고 들었습니다.”

곡절을 안고 지은 새집에서 그린 <농악> 또한 고인 사후 10년도 안 돼 이국살이를 하면서 숱한 방랑의 역사를 품게 된다. 성남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농악>은 원래 자신이 가장 아꼈던 고인의 유산으로, 거래에 응하지 않고 고이 보관했던 애장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년간 서울 면목동 등지로 이사를 다니면서 일반 가옥에 소장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거칠고 조악한 아사천으로 캔버스를 짠 표면에 숱하게 덧칠하는 아버님 특유의 기법으로 두툼한 물감층을 올린 탓에 화폭이 겨울에는 팽팽해지고 여름에는 ‘늙은이 뱃가죽’처럼 표면이 쭈글쭈글해졌어요. 그게 되풀이되다 보니 표면이 갈라지고 물감층이 떨어져 나가는 박락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요.”

1973년 작품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보다 못한 성남씨는 부친 작품을 다수 거래하던 화상 한용구에게 <농악>을 보수·보존할 비책을 물었다. 박수근이 거래하던 반도화랑 전 직원으로 생전 인연이 깊었던 박명자씨와 국내 최초의 상업화랑 현대화랑을 공동 창업했던 화상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모노파 회화의 기수로 주목받던 재일 청년 작가 이우환에게 작품을 넘기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당시 민화 등 전통회화에도 밝았던 이 작가가 세계적인 수복 보존 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 기관이나 장인을 알선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작품의 안위를 생각한 성남씨는 이별의 아픔을 누른 채 <농악>을 선뜻 넘겼다. 일본에서 작품을 인수한 이 작가는 현지 장인에게 보수를 맡겨 박락 등으로 생긴 훼손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수복 복원 비용을 댔던 당시 국내 대기업 일본지사장 이성진씨가 한용구의 알선으로 보수된 작품을 넘겨받아 소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1977년 미국 뉴욕주로 이민을 떠나면서 작품 또한 함께 태평양을 건너게 된다.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소장된 <농악>. 지난해 삼성가가 따로 기증한 소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대작 <농악>과 함께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있었다. 박수근미술관 제공

그 뒤로 <농악>은 10년간 이씨의 미국 집에 걸려 있었다. 그러다 1983년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이 삼성가 컬렉션 수집 작업을 본격화하면서 고국에 다시 돌아온다. 작품이 귀환하게 된 단서는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근대미술 60년전’을 열면서 펴냈던 도록이었다. 그 전시에 성남씨가 <농악>을 출품하면서 소장자로 도록에 이름이 명기됐는데, 10년 뒤 이건희 부회장 아래서 수집 실무자로 일하던 화상 이호재씨가 도록에서 이 작품과 소장자 이름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가장 규모가 큰 박수근 작품이라는 점에 솔깃해진 이씨는 옛 소장자였던 성남씨와 한용구 화상에게 연락해 행방을 수소문했다. 현재 가나아트갤러리 회장인 이씨의 증언이다.

“이건희 부회장은 미술관에 계속 걸 만큼 가치가 큰 작품이냐고 거듭 물었어요. 당연히 그렇다고, 박수근 작품 가운데 가장 큰 대작이라고 보고했더니 바로 구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미국에 사는 소장자 이씨가 작품을 갖고 있다는 화상 한씨의 말을 듣고 곧장 그가 사는 뉴욕주 스카스데일로 날아가 구매 담판을 벌였지요.”

생면부지의 화상 이씨가 갑자기 찾아와 작품을 달라는 의사를 밝히자 이성진씨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고 놀라면서도 “소중한 대작이라 개인에겐 절대 줄 수 없다”고 버텼다. 화상 이씨는 “삼성가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를 원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집요하게 설득했다. 결국 당시 20만달러 상당의 액수(한화로는 1억5천만원)를 주고 작품을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오늘날 미술 시장에서 이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평가한다면 당대 인수액의 100배 이상인 150억~200억원 정도에 이를 것이라는게 이호재 회장의 추산이다. 이렇게 해서 이국 땅에 건너간 지 10년 만에 고국에 귀환하게 된 <농악>은 삼성가 박수근 컬렉션의 핵심 작품으로 40년 가까이 소장됐다가 지난해 4월 이건희 기증 컬렉션에 포함되면서 국립미술관 품에 안착했다.

병마와 맞서는 작가의 투혼으로 그려진 까닭일까. 농악의 쟁쟁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명작 <농악>은 훼손을 막으려는 유족의 고심을 업고 작품 유전이 시작됐다. 뒤이어 거장과 화상, 컬렉터들의 손길을 두루 거치면서 외국에서 건강을 되찾았고, 작품 소재를 추적한 끝에 국내 귀환을 이룬 삼성가의 기증 결단으로 국민 앞에 온전한 자태를 길이 내보일 수 있게 됐다. 정녕 ‘아름다운 회귀’라고 할 만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유족·박수근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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